지난 기획/특집

[대림기획] 이 땅에 빛을 - 아프리카 남수단 초원을 찾아가다 (1)

아프리카 남수단 룸벡 주정아 기자
입력일 2011-11-23 수정일 2011-11-23 발행일 2011-11-27 제 2772호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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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질병에 허덕이는 그들의 가족이고 싶어요”
# 프롤로그

말라리아약이 필요합니다. 옥수수가루도 부족합니다. 우물 바닥도 쩍쩍 갈라지는 건기인데요. 축사 같이 생긴 성당이라도 하나 세울 수 있다면 이들이 얼마나 기뻐할까요….

이른바 구걸이라도 해야 할 상황이었다. 메마른 아프리카 초원에 외따로 선 사제가 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 방법은 아니란 것을 잘 안다. 사제들의 힘만으로 버텨볼 참이었다. 우선 그들 곁에서 ‘살기’ 시작했다. 그 해 2008년이었다. 처음엔 이방인이었지만 이젠 그들의 아버지가 됐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지난 10월, 3명의 선교사제를 대표해 한만삼 신부가 한국에 나왔다. ‘해외출장’이었다. 3년여 전부터 자나 깨나 필요하다고 부르짖던 작은 포클레인을 구하는 것이 가장 큰 목표였다. 벽돌기계공장도 다시 찾았다. 그곳에 가져간 기계가 돌지 않는 원인을 찾기 위해서였다. 또다시 다른 공장으로 이동, 오토바이 부품과 배터리, 타이어, 자전거 등을 골랐다. 앞서서는 서울 남대문시장과 황학동풍물시장 등도 샅샅이 훑었다. 몇 년 동안 사용해 깨지고 찌그러진 플라스틱 식기를 대신해 튼튼한 스테인리스 용품을 고르고 싶었지만, 돈 걱정에 선뜻 집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대형냄비와 그릇들은 넉넉히 집어올렸다. 새로 본당을 설립하면 꼭 필요한 물품이다. 11월 전에 컨테이너를 출발시키기 위해 정신없이 뛰었다. 사제들의 1년치 식량이 될 쌀과 온갖 생필품, 성물들은 물론 못 하나에서부터 시멘트와 패널 등 각종 건축자재들을 꽁꽁 싸 넣었다. 그곳에서는 약간의 농산물과 가축을 제외하면 그 무엇도 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물건들은 내년에나 만날 수 있겠지. 예수성탄대축일 선물로 올 수 있으려나. 아니, 내년이라도 좋으니 무사히 도착해주기만을….”

지난해 한국에서 보내준 컨테이너를 인도양 해적들에게 빼앗겨 곤욕을 치른 경험을 새삼 떠올랐다. 당시 컨테이너를 다시 찾는 데만도 6개월의 시간이 걸렸다.

또다시 기나긴 기다림이 시작됐다.

11월 첫 주, 수원교구 복음화국 해외선교부 담당 고태훈 부국장 신부와 수원가대 신학생 등이 남수단으로 보낼 컨테이너 포장 작업을 도왔다.

# 길이 아닌 길을 가다

아프리카 남수단 룸벡(Rumbek)교구 아강그리알(Agangrial), 한만삼·표창연·정지용 신부가 현재 공동사목을 펼치고 있는 본당이다. 수원교구 소속의 이 신부들은 룸벡교구 현지인 선교를 위한 피데이 도눔(Fidei Donum, 신앙의 선물)으로 파견됐다. 남수단은 아프리카대륙 안에서도 손꼽히는 극빈국이다. 지난 7월 북수단과 분리, 독립국가를 이뤘지만 수십년 간 이어진 내전으로 삶과 정신 모든 것이 피폐함 그 자체다. 사회기초시설 복구는 물론 정상적인 국가행정도 당분간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한국의 선교사제들은 극도의 가난과 질병 등에 허덕이는 이곳 남수단에서 그들의 가족이 되어 살고 있다.

전례력으로 새로운 한 해를 맞아, 남수단에서 활동하는 선교사제들과 지역민들의 일상에 들어왔다. 대림시기의 시작, 남수단 신자들을 찾아오는 아기 예수는 어떤 모습일까.

빤게우공소 어린이들이 한만삼 신부와 본당 전교회장, 교리교사 등의 일행을 마중하기 위해 마을입구에서 2km 떨어진 곳까지 뛰어나와 ‘웰컴 파더’를 노래하고 있다.

한국서 남수단까지 비행시간만 24시간

한국에서 남수단까지, 차량 이동과 경유 시간을 뺀 비행시간만 꼬박 24시간이다. 게다가 케냐 나이로비에서 룸벡까지 타야 하는 낡은 프로펠러 비행기는 겉모습만으로도 손에 땀을 쥐게 했다. 이 난해한 비행의 울렁거림이 채 가라앉기도 전, 기자는 또 한편의 스펙터클 3D 영화 같은 일상에 동행했다.

아강그리알에 도착하자마자 빤게우(PanGeu) 공소에서 어린이 세례성사를 청해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직 사제들이 한 번도 방문하지 못했던 공소라며 한만삼 신부는 망설임 없이 움직였다. 외딴 숲속 공소에서의 세례식이라니, 반가운 마음에 기자도 냉큼 따라 나섰다.

빤게우 신자 100여 명이 흙과 마른풀로 지어진 작은 공소를 빼곡이 채웠다. 비록 예정된 세례식은 봉헌되지 못했지만, 오랜만에 사제를 만나 미사를 봉헌하는 신자들에게는 이날이 잔칫날과 같았다.

길이 없어 비포장 길을 3시간 달려

아뿔싸. 외딴 공소 정도가 아니었다. 지도상 본당과 공소의 직선거리는 20여km가 채 되지 않았지만 ‘길’이 없었다. 본당과 연결된 쉐벳(Cueibet) 공소까지 이어진 자동차 흔적을 따라 20여km, 비포장 흙길을 10여km, 또다시 허허벌판 또한 20여km 거리를 3시간가량 돌고 돌아야 했다. 지난달까지 줄기차게 쏟아져 내린 빗물에 울퉁불퉁 파인 ‘길’은 결코 ‘길’이라 표현키 어려웠다. 차량 좌석에 엉덩이가 붙어있는 시간이 전체 여정의 절반이나 될까, 차가 초원으로 접어드니 더욱 난감하다. 태양이 없으면 방향조차 가늠하기 어려운 벌판이다. 길도 없는데 ‘앞으로’만 되풀이하는 본당 전교회장의 안내에 따라 수풀을 헤치며 달렸다.

이곳에서 사제들은 늘 길이 아닌 곳을 가곤 한다. 그들을 기다리는 신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끝없이 펼쳐진 초원과 그 위를 헤매는 독수리와 매 떼에 익숙해질 무렵, 이젠 곧 도착하는가 싶었는데, 갑자기 차가 서고 한 신부가 날쌘 동작으로 움직였다. 타이어 펑크다. 지름 2cm는 됨직한 나뭇가지가 타이어 옆에 박혀 있었다. 순식간에 쉬익 쉬익 바람이 빠지는 속도와 차를 들어 올리고 타이어를 빼내는 한 신부의 동작 속도가 서로 경쟁하는 듯하다. 비 오듯 땀을 흘리는 신부의 입에서 혼잣말이 흘러나온다. “거의 새것이나 다름없는 타이언데…. 후원자들이 사주신 건데….”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오지에서 단련된 터라 한만삼 신부는 누구보다 능숙하게 타이어를 갈아 끼운다.
기다리는 공소신자들 걱정에 조바심이 날 무렵, 한 무리의 어린이들이 천으로 만든 플래카드를 들고 노래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몇 년 만에 만나는 신부를 마중하기 위해 마을입구에서 2km 이상을 맨발로 걸어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극진한 환대의 노랫소리는 힘겨운 여정을 싹 잊게 했다.

응급환자 진료소로 옮겼지만 치료조차 힘들어

하지만 이날, 어린이들의 세례식은 없었다. 어린이들은 아직 기초교리나 기도문을 충분히 숙지하지 못한 상태였다. 부모들조차 준비가 되지 않은 모습에 한 신부는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본격적인 건기가 시작되면 주민들은 모두 물과 먹거리를 찾아 마을을 떠나 강가로 이동한다. 그 전에 세례성사를 진행하려는 교리교사의 뜻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성사를 집전할 순 없었다. 그래도 공소 신자들과 얼굴을 마주하고 작은 선물이나마 나눌 수 있는 귀한 시간이었다. 빠른 시간 안에 다시 성사를 준비하자는 말을 남기고 차에 오르려는데 환자가 있다는 다급한 전갈이 전해졌다. 낡아빠진 스펀지를 겹겹이 깔고 곧 쓰러질 듯한 아기엄마를 태웠다. 인근 지역에서 가장 가까운 NGO 진료소까지도 30여km. 진료소에 도착해 차량 문을 열자마자 자지러질 듯 소리 내 우는 아이의 모습이 가슴을 쓸어내리게 했다. 환자는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맥이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곳에서의 치료법을 설명하는 한 신부의 말에 다시 기가 막혔다.

“쉐벳 진료소에는 다행히 식염수가 있다니 탈수 정도는 막을 겁니다. 상태가 계속 안 좋으면 룸벡으로 옮겨야 할 겁니다.”

아강그리알성당으로 되돌아올 때 쯤 한 신부와 동행한 교리교사 등은 모두 녹초가 돼 있었다. 겨우 한숨을 돌리고 신부들과 식탁에 둘러앉았다.

아강그리알본당 마이클 루엣 전교회장이 빤게우 공소 어린이들에게 기도문과 기초 교리에 대해 질문하고 있다.
빤게우 마을에서 아무런 치료도 받지 못하고 고통받고 있던 환자를 한만삼 신부와 한국에서 온 간호봉사자가 쉐벳 지역 NGO 진료소로 긴급히 옮기고 있다.

태양광 발전장치 고장에 일순간 암흑천지로 변해

일상에 대한 궁금함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와 막 입을 열려는 순간, 거짓말처럼 암흑천지가 됐다. 잽싸게 손전등을 챙겨들고 발전장치를 살펴보는 신부와 몽당초를 찾아 켜는 신부. 태양광 발전 장치가 고장난 건지 최근에 자주 힘을 못 쓴다고 설명한다. 오늘 낮, 첫영성체자들의 사진을 프린트하고 두어 시간 냉장고를 돌린 것이 화근일 거라는 의견들이 오갔다. 이제 내일 아침 해가 뜨고 태양열이 충전될 때까지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기다리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는 정지용 신부의 말이 조금은 이해가 됐다.

어두움 속에서 또다시 기다림이 시작됐다.

※남수단 선교에 도움을 주실 분 : 신협 03227-12-004926 천주교 수원교구

문의 : 031-548-0581

아프리카 남수단 룸벡 주정아 기자 (stella@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