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양심도 없소?』라는 말을 가끔 듣는다. 이 세상에 양심이 없는 사람도 있는가? 어떤 사람이 양심 없는 사람인가? 철없는 어린아이를 유괴하여 잔인하게 죽이는 흉악범인가? 장난삼아 산에 불을 지르는 사람이 그런 사람인가?
요사이 우리나라는 제5공화국의 비리문제를 놓고 심한 진통을 겪고 있다. 국회의 5공비리 특위의 청문회에서는 증인들을 앉혀놓고「양심에 따라」증언하도록 선서를 시키고 또 이를 누차 확인하기도 했다. 어떤 경우에는 증인에게 종교인으로서의 양심으로 솔직하게 진실을 말해달라고 부탁도 했다. 여기서 말하는 양심은 무슨 뜻인가? 우리 교회가 평소 가르치는 양심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사실 권력을 이용한 비리나 지도층인사들의 부정행위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 헌정사상 여태껏 해결하지 못한, 우리가 짊어진 병폐이다. 또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선거 때마다 자신이 당선되기 위해서 거액의 금품을 살포하여 유권자들의 양심을 팔도록 강요한 정치인들이 많았다는 것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양심대로 증언해야 한다고 외치는 사람도 과연 자신도 양심대로 깨끗하게 살고 있을 것이라고 우리가 믿지 못하는 것 또한 문제가 된다. 결국 우리사회는 깊이 병들어 있는 것이다.
양심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지금 우리에게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우리들 보통사람들의 생활 속에서도 양심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흉악범이나 강도 짓하는 사람을 제쳐놓고서라도 예컨대 비가 오는 밤, 몰래 공장 폐수를 흘려보내 강을 오염시키는 사람과 인체에 해로운줄 알면서도 농약을 쳐서 콩나물을 만드는 사람이나 고아나 부랑아를 등쳐먹는 자칭 자선사업가들, 미성년자들에게 저질 비디오를 틀어주는 만화 가게, 가출소녀를 홍등가에 팔아넘기는 인신 매매단, 산에 놀러가서 쓰레기를 아무데나 버려서 산을 오염시키는 사람들, 홀짝수운행을 교묘하게 피해버리는 자가용들 등등 … 이렇게 나열하다보면 마치 우리나라전체가 양심 없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는 느낌을 준다.
양심이란 무슨 말인가? 성서학자의 말을 빌리면 헤브레아어로 기록된 구약성경에서는 이 양심이란 정확한 단어는 없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당시 유태인들이 모두 양심 없는 사람들은 아니었을 것이다. 비록 양심이란 말은 없으나 그에 준하는 말은 비유적으로 많이 나오고 있다. 창세기에는 아담과 이브의 범죄행위와 나쁜 양심에 대한 말이 있고 카인의 살인과 다윗왕의 간음을 기록하고 있다.
사실은 우리가 양심이라고 하는 말을 구약성경에서는 자주「마음」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다윗은 병적조사를 하고나서 양심에 가책을 받았다. 그는 야훼께 기도드렸다. 『제가 이런 못할 일을 해서 큰 죄를 지었습니다』(사무엘하24, 10) 한편 신약성경에는 죄 없는 예수를 은전 30냥에 팔아넘긴 유다스의 나쁜 양심이나 예수의 제자로서 그를 세 번씩이나 배반하고 나중에 자기잘못을 알고 울었다고 하는 베드로의 비겁한 양심도 얘기하고 있다. 예수는『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데 바로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마태오15, 18)고 했다. 그런데 사도 바오로는 양심이란 말을 스무번이나 사용했다 한다.
그는 이 양심은 유태인이나 그리스도교 신자뿐만 아니라 외교인들도 포함하여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갖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방인들에게는 율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본성에 따라서 율법이 명하는 것을 실행한다면 비록 율법이 없을 지라도 그들 자신이 율법의 구실을 합니다. 그들 마음속에는 율법이 새겨져 있고 그것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로마서 2, 14-15).
결국 사람은 누구나 예외 없이 양심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비록 외교인들이 양심이란 표현은 모른다 해도 반드시 옳은 행동을 해야 하는데 이를 하지 않으면 잘못이란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길거리에 어떤 장애자가 넘어져 있다고 하자. 그가 스스로 일어설 수가 없다면 누가 도와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반드시 도와주어야 한다고 모두 생각할 것이다. 지금까지 나온 소설가운데 도스토예프스키의「죄와 벌」과 같은 베스트셀러들도 양심가책문제를 많이 다루고 있다.
이처럼 양심이란 문제는 누구에게나 절실한 문제이고 또 이 양심은 사람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정신적 능력이라 한다. 즉 조물주가 부여한 능력이며 조물주의 목소리라 할 수 있다. 이 양심은 하느님이 사람에게 그때마다 마음에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기의 도덕적 의무를 인식할 수 있도록 하느님이 그에게 이 능력으로 무장시켜준 것이다. 그러므로 양심이 없다는 표현은 사람에게 원래 양심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의 양심이 약하게 발전했거나 마치 양심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조물주 하느님을 거부하는 사회에는 이처럼「양심 없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기 마련이다. 하느님이 없는 사회에는 선과 악의 구별도, 올바른 가치관이나 인생관도 세울 수 없을 것이다. 우리사회가 병들어 있다는 것은 구태여 제5공화국 때의 비리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하느님 없이 살아온 너무 많은 보통사람들이 양심을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속담과 같이 저위의 사람들이 참다운 양심을 국민들에게 보여 주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우리 작은 생활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양심 없는 행위들이 하나씩 정화되고 양심, 즉 하느님의 목소리를 두려워하여 양심을 팔지 않는「하느님의 사람들」이 이사회를 지켜주어야 할 것이다. 이는 결국 우리자신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