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은 멀어도 마음은 가까이… 사랑을 잇는 안부 전화 사회적 거리 두기로 격리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사랑의 행위를 찾아보았다 작은 얼음 조각 위에서 불안해하고 있을 분들이 떠올랐다 그 이웃들 안에 계신 예수님을 위로해 드릴 수는 있을 것 같았다
복음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사랑’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다섯 음절인 ‘사랑하여라’나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9)라는 한 문장 역시 복음의 골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하여라’에서 ‘하여라’는 동사다. 사랑이라는 명사를 동사형으로 쓴 것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사랑을 어떤 개념으로 마음속에만 담아 두지 말고, 직접 움직여 실행하기를 바라셨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대상을 이웃으로 지정해 주시며 방법까지 일러 주셨으니 ‘너 자신처럼’이라는 한마디에 답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사랑에 서툴다. 내 딴에는 사랑하느라고 했지만 상대는 오히려 반대로 느낄 수도 있고, 어느 노래 가사처럼 나의 ‘세심한 사랑’이 그에게는 ‘구속’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생각지도 않았던 사회 현상에 모두 놀란 가슴이다. 코로나19가 창궐하면서 이웃이 기피해야 할 대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독자적 생존력도 없는, 생물과 무생물의 중간 단계인 바이러스에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해하고 있다. 마스크를 사기 위해 긴 줄을 서거나, 같은 엘리베이터를 탄 사람이 혹시 확진자가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서로 곁눈질하게 되고, 내가 움직일 동선이 안전한가를 따지게 되었다. 마치 한겨울에 꽁꽁 얼었던 호수가 쩡 하고 깨어지면서 사람들을 낱낱의 존재로 갈라놓은 느낌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사랑하여라’라는 복음을 살 수가 있을까? 그것도, 나 자신만큼? 형제 안에 예수님께서 계시다는 이야기를 포콜라레 모임에서 처음 들었을 때는 매우 놀라웠다. 그 후,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창세기의 표현이나,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한 것’이 예수님께 한 것이라는 말씀을 귀담아들으며 그것이 교회의 노선임을 알게 되었고, 형제를 통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기본자세임을 새길 수 있었다. 이런 생각은 절로 떠오르는 것이 아니기에 의지적으로 해야 하지만, 이를 기반으로 하는 사랑은 실패율이 낮다는 것도 경험했으니, 이는 분명 사랑을 잘하게 하는 비결임을 알게 되었다.장정애 (마리아고레띠·마리아 사업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