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압된 삶 속에서 하느님 향한 용기는 더 빛나 유교 문화 안에서 제약 많았던 여성들 비참한 현실 견디며 꿋꿋이 신앙 지켜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된 삶 살기 위해 동정생활 결심한 여성 신자들도 많아
‘일곱 살이 되면 남녀가 한자리에 같이 앉지 않는다’는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이 통용되던 조선시대. 남자 선교사가 부녀자들에게 선교하는 것은 위험하고 어려운 일임을 짐작할 수 있다. 달레 신부는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여자는 남편의 허가 없이는 외출도 할 수 없고 거리에 눈길을 던질 수조차도 없다. 그런 까닭에 수많은 천주교 신자 부인들은, 더군다나 박해 때는 성사에 전혀 참여할 수가 없었다. 외간 남자의 손이 닿았다고 해서 아버지가 딸을, 남편이 아내를 죽이기도 하고 여자가 자살하는 일도 있었다’고 전한다.
최양업의 서한에는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기 위해 용기를 낸 많은 여성 신자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최양업은 이들이 여성이기 때문에 주목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탁한 이들의 깊은 신심을 기억해야 한다는 의지를 서한을 통해 드러낸 것이다. ■ 여성들의 비참한 삶, 서한을 통해 전한 최양업 103위 성인 중 47명, 124위 복자 중 23명이 여성이다. 시복시성된 순교자 중 30%에 달하는 수치다. 이들이 순교하기까지 얼마나 비참하고 어려운 삶을 살아왔는지 최양업의 서한을 통해 잘 드러난다. 양반 출신인 안나라는 여교우에 대해서 “19년 동안 철저히 외교인 집안에 갇혀 지내면서 신자들과 연락을 하지 못했습니다… 안나는 마을 전체가 온갖 미신을 숭상하는 곳에서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혼자서 신자의 본분을 조금도 궐한 적이 없었습니다”라고 최양업은 전한다. 과부들의 상황은 더욱 비참했다. “과부가 되면, 비록 혼인한 지 하루 만에 남편을 잃었다 하더라도 반드시 수절을 해야 합니다. 만일 재혼하려고 하면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그녀의 불명예로 말미암아 온 가문에게도 망신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부들은 항상 밤에 성사를 받으러 옵니다. 밤길을 다니는 모험 중에 얼마나 많은 비극을 당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어려움 속에서 신앙을 향한 이들의 용기는 더욱 빛났다. 최양업은 서한에서 “마을 유지의 부인은 남편에게서 엄포와 공갈과 매질과 핍박 등 온갖 괴로움을 당했으나 조금도 굽히지 않고 굳세게 저항해 신앙을 보존했다”고 전하는가 하면 “배교하지 않으면 관가에 고발해 죽게 하겠다고 위협했으나 그리스도의 충실한 여종은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고 하느님을 위해 죽기로 마음먹고 재판소인 관가로 끌려갔다”고 밝혔다.민경화 기자 mk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