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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 (26)최양업의 사목방문 발자취 남아있는 연풍성지

민경화 기자
입력일 2022-06-28 수정일 2022-06-28 발행일 2022-07-03 제 3301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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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준한 고개 넘고 넘어 산골 교우촌 신자들 만나

신앙 지키려 연풍 골짜기에 숨어 살던
신자들의 신심 깊은 모습 서한에 담겨
병인박해 때 연풍 출신 신자 13명 순교
사형 도구 형구돌 발견돼 성지에 안치

황석두 성인, 다블뤼 주교, 위앵 신부, 오메트르 신부, 장주기 성인(왼쪽부터)을 형상화한 다섯 성인상과 반석.

소백산맥 자락에 위치한 연풍은 전체가 산릉에 속한 험지다. 문경시와 접경지대에는 조령산과 백화산 등 소백산맥의 주봉들이 높이 솟아 있다. 그만큼 험난하기에 예로부터 경기도와 서울을 중심으로 일어난 박해를 피해 충청도와 경상도로 새로운 은신처를 찾아 나선 순교자들이 모여들어 일찍이 교우촌이 형성됐다.

연풍의 산간 지역은 신앙을 지키려는 선조들이 문경새재와 이화령을 넘어 경상도로 피신하는 길목이 됐다. 또한 산세가 험했기에 신자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보금자리가 됐다. 연풍 골짜기에 숨어 살았던 신자들을 만나기 위해 문경새재를 수없이 많이 넘었을 최양업 신부. 충북 괴산군 연풍면에 위치한 연풍순교성지에서는 신자들에게 향했던 최양업 신부의 발자취를 찾을 수 있다.

■ 충청도 끝자락에 심어진 복음의 씨앗, 연풍에서 자라다

연풍 지역에 첫 복음의 씨앗이 떨어져 신앙 공동체가 형성된 것은 1784년 말 조선교회가 창설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다. 신자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충청도 끝자락인 연풍에 모였다. 이곳의 역사는 1866년에 흥선대원군이 일으킨 병인박해로 인해 피의 순교사로 변하게 된다. 연풍에 신자들이 모여 산다는 것이 알려지자 교우촌에 포졸들이 들이닥쳤고, 신자들은 연풍 관아로 끌려가 모진 고문 끝에 죽음을 당하거나 도살장(연풍 옥터)이란 곳으로 끌려가 목숨을 잃었다. 병인박해 때 순교한 연풍 출신 신자는 13명이다.

연풍 병방골(괴산군 장연면 방곡리)은 황석두(루카) 성인의 고향으로도 알려져 있다. 부친이 천주학을 버리라며 작두날을 들이내자, 기꺼이 목을 내놓았다고 알려진 황석두는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 갈매못에서 순교했다.

이처럼 신앙선조들의 자취와 피의 순교 역사가 어려 있는 연풍을 기억하고자 충북 괴산군 연풍면에 연풍순교성지가 세워졌다.

청주교구는 1963년 연풍공소로 사용하기 위해 옛 향청 건물(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13호)을 매입했고, 이곳에서 박해 때 신자들을 죽이는 도구로 사용된 형구돌 3개를 발견했다. 이중 2개의 형구돌을 성지에 안치했다.

1968년 순교자 황석두의 시복식 이후 그의 고향이 연풍으로 드러나면서 성지 개발이 가시화됐다. 1979년 순교 현양비를 세우고 3년 뒤인 1982년 병방골 평해 황씨 문중 산에 묻혔던 황석두 성인의 유해를 연풍순교성지로 천묘했다.

이후 황석두 성인과 함께 갈매못에서 순교한 다블뤼 주교, 위앵 신부, 오메트르 신부, 장주기 회장 등 다섯 성인상과 반석(오성바위)을 재현해 1986년 축복식을 열었다. 또 최초의 한국인 주교인 고(故) 노기남(바오로) 대주교의 동상과 높이 8.5m의 대형 십자가도 마련했다.

2008년 청주교구는 교구 설정 50주년을 기념해 신자들의 영성생활과 순교영성의 함양을 위해 배티성지에서 연풍순교성지를 잇는 91.5㎞의 ‘신앙 선조들과 함께 걷는 도보 성지순례길’을 만들어 시행하고 있다.

2013년 3월 9일에는 성 황석두 루카 탄생 200주년 기념성당 기공식을 열고 2014년 9월 20일 봉헌했다. 대지 2256㎡에 건축연면적 1204㎡ 규모의 성당은 신앙선조들을 기억하고 기도하기 위해 모인 순례객들에게 거룩한 기도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 신자들 만나기 위해 문경새재를 수없이 넘었던 최양업

1849년 상해에서 사제품을 받고 귀국한 최양업. 그는 조선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전라도와 경상도 남북부 지역을 다니며 신자들과 만났다. 경상북도 문경시와 충청북도 괴산군 사이에 있는 문경새재는 그가 사목순방을 하기 위해 주로 지났던 고개다.

박해를 피해 연풍으로 모인 신자들은 새재라는 천혜의 도주로를 이용해 관문 성벽 밑의 수구문을 통해 문경 땅을 넘나들며 모진 박해를 피했다. 최양업도 이러한 장점을 활용해 문경새재를 넘나들며 신자들에게 은밀하게 복음을 전했다.

험난한 산길을 오가느라 몸은 힘들지언정, 골짜기마다 숨어서 간절히 자신을 기다리는 신자들과 만날 수 있기에 기쁨이 더 컸을 최양업. 특히 연풍이나 문경과 같이 비밀스럽게 신앙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신자들은 교리 실천에 열심이었을 뿐 아니라 신심이 깊었기에 이들과 만나러 가는 길이 고된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는 최양업의 서한에도 드러난다.

“교우들은 거의 모두 비신자들이 경작할 수 없는 험악한 산 속에서 비신자들과 아주 멀리 떨어져서 살고 있습니다. 이런 교우들은 거의 다 교리에도 밝고, 천주교 법규도 열심히 잘 지키고 삽니다. 그래서 열심한 교우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죄악과 세속의 모든 관계를 끊고 조선의 알프스라고 할 수 있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담배와 조를 심으며 살아갑니다.”

연풍순교성지에서 발견된 세 번째 형구돌.

민경화 기자 mk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