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들이 신뢰한 신심 깊은 교우촌이자 선교 거점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들 머물며 조선의 말과 풍습 익히던 교우촌 성 도리 신부 순교 100주년 기념해 프랑스 교회에서 먼저 성지 개발 시작
1658년 아시아 선교를 목적으로 설립된 파리 외방 전교회는 이곳저곳을 옮기며 포교 활동을 하는 게 아니라 선교사들이 일정한 포교 지역에 머물며 언어와 풍습을 배워 선교에 나서도록 했다. 초기 한국교회에 파견된 선교사들도 마찬가지였다. ‘향기로운 골짜기’라는 뜻의 ‘손곡’(蓀谷)에서 유래된 경기도 용인 ‘손골’(현재 수지 동천동). 여기에는 당시 프랑스 선교사들이 머물며 조선어와 한국 풍습을 익힌 자취가 서려 있다.
손골은 박해 시대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 ‘성교촌’(聖敎村)으로 불릴 만큼 천주교 신자들의 마을, 교우촌이었다. 1839년 기해박해 때부터 신자들이 공동체를 이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담배 농사를 지으며 근근이 힘겹게 살아가면서도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광교산 기슭에 신자들만 모여 사는 손골의 환경은 여러모로 서양 선교사들이 조선교회에 적응하며 선교를 준비하기에 적합했던 듯하다. 1857년부터 1866년까지 여러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들이 머물렀는데, 병인박해 때 순교한 성 도리 신부는 한국에 있던 8개월 대부분을 손골서 지냈고 성 오메트르 신부는 33개월의 한국 생활 중 절반을 여기서 기거했다. 또 여러 지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도 이곳에서 피정 등의 시간을 가지며 박해 상황으로 힘든 몸과 마음을 쉬어갔다. 이처럼 선교사들의 신뢰를 받았던 신심 깊은 교우촌 손골은 그런 만큼 박해시기 선교의 중심지였다.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 주교는 성 오메트르 신부에게 ‘손골과 가까운 고을 네 곳을 사목하라’고 명했다. 그 지침대로 성 오메트르 신부는 손골을 중심으로 미리내, 무량골, 소내실 등 교우촌을 방문하며 신자들을 살폈다. 맨 처음 손골 교우촌에 거주하면서 조선어를 익힌 선교사는 페롱 신부였다. 베르뇌 주교는 1857년 3월 페롱 신부가 입국하자 손골로 보냈다. 최양업 신부는 이때 페롱 신부를 찾아가 만났다. 최 신부가 1857년 9월 14일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그의 열세 번째 서한에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나온다. “저는 두 번이나 페롱 신부님을 찾아가서 여러 날 묵었습니다. 저는 신부님이 미리 알려주신 덕분으로 페롱 신부님을 잘 알고 있었고, 페롱 신부님도 저의 외로운 처지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서로 우정을 느꼈습니다. 또 우리가 인연으로 함께 묶여있음을 미리 맛보고 있는 터였기에 우리는 주님 안에서 기쁨을 함께 나눴습니다.” 최 신부에게 이 시기는 전국에 흩어져 있는 교우촌 신자들을 순방하던 때였다. 1850년부터 양들을 찾아 나섰던 그는 특히 이 해에 전국 신자 수의 26.8%를 만났다. 그런 처지에서 페롱 신부와의 만남은 같은 사목자로서 특별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페롱 신부님도 저의 외로운 처지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라는 부분에서는 신자들을 생각하고 애쓰는 최 신부의 심정이 고스란히 읽힌다.이주연 기자 mik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