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우들에게 바른길 가르치고 일깨워주심이 깊고 그윽했다” 옥중에서 쓴 마지막 편지를 신자들이 읽어보도록 당부 형장서 순교할 때 군사에게 천주교 믿어 따를 것 호소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한국교회의 소원을 이룬 첫 한국인 사제다. 성인의 신앙과 생각은 그가 남긴 25편의 편지와 선교사들이 전한 편지들에서 알 수 있다.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는 “열렬한 신앙심, 솔직하고 진실한 신심, 놀랄 만큼 유창한 말씨는 한 번에 신자들의 존경과 사랑을 그에게 얻어 주는 것이었다”는 말을 남겼다.
당시 신자들은 성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생애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을 맞아 1839년과 1846년 순교자를 대상으로 한 「기해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을 통해 김대건 성인에 대한 신자들의 증언과 기록을 살펴본다. ■ 김대건의 출생·유학과 사제서품 김대건 신부가 충청도 내포 출신이고, 김제준 이냐시오의 아들이라는 것은 당시 신자들 사이에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시복재판록에 따르면 함 막달레나는 “내력은 자세히 모르오나 말 들은 즉 충청도 교우 자손”이라고 진술했다. 오 바실리오는 “본래 충청도 내포(內浦)사람”이라고 했고, 이 마리아도 “본디 내포 사람”이라고 증언했다. 김 프란치스코는 좀 더 구체적으로 “본래 충청도 내포 사람이라, 부친은 기해년(1839)에 치명한 김제준 이냐시오”라고 했다. 최 베드로도 “내포 사람이온데 기해년에 치명한 (김제준) 이냐시오의 아들”이라고 말했다. 성인의 탄생지를 가장 명확하게 증언한 사람으로는 이 베드로가 꼽힌다. 이 베드로는 충청도 덕산 출신으로, 24세이던 1838년에 윤 바르바라와 결혼한 후 일명 골배마실로 불리는 양지 배마실에 거주했다. 이후에는 김대건 신부에게 성사를 받았다. 그는 다른 이들이 성인의 출생지를 ‘충청도 내포’라고 진술한 데 반해, “‘충청도 면천(沔川)’ 사람이온데 태중 교우”라고 증언했다. 내포 지역 중에서도 현재 당진군에 속하는 ‘면천’을 김 신부 고향이라 했고, 부모 모두 신자라고 밝힌 것이다. 이는 모방 신부 서한에 첨부된 신학생 서약서 중 김 신부 고향이 ‘면천 솔뫼’라는 기록과 가장 비슷한 증언이라는 것이 학자들 견해다. 어린 시절과 유학을 떠난 사실에 대한 내용은 많지 않다. 이 베드로는 “(김제준) 이냐시오는 본래 충청도 내포 사람으로 용인 굴암(현 용인시 이동읍 묵리)서 살 때 죄인이 보았삽고, 집안 식구가 다 열심 수계하며, 이냐시오는 자기 아들(김대건)을 성교회에 바치고, 회장 소임을 맡아…”라고 밝혀 용인에서 성장하고 유학을 간 것이 드러난다. 성인의 유학에 대해서 김 프란치스코, 서 야고보, 이 마리아 등은 “김대건이 어려서부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총명했기 때문에 신학생으로 뽑혔다”고 증언했다. ■ 김대건 신부의 사목활동 1845년 8월 17일 중국 진쟈샹(金家巷)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은 김대건 신부는 이후 8월 31일 라파엘호를 타고 상하이를 출발해 10월 12일 강경에 도착했다. 페레올 주교, 다블뤼 주교와 함께였다. 이는 시복재판 증언에서도 나온다. 김성서 요아킴은 “김 안드레아 탁덕은 조선 사람으로서 10여 세에 중국에 들어가 신품 공부를 하고 마친 후에 조선으로 도로 나왔으나, 신부 아니 계신 때라 진심갈력하여 위험을 불고(不顧)하며 조선 교우를 데리고 작은 배를 타시어 상해로 들어가 고 주교(페레올 주교)와 안 신부(다블뤼 주교)를 모시고 도로 조선 배를 타고 나오신지라…”라고 밝혔다. 여기에 더해 최선정 베드로는 “7품을 받자온 후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 두 위를 모시고 강경이 황산(黃山) 동네에 내리시며, 먼저 서울 와서 안배한 후 수삭을 쉬시고, 즉시 전교 시작하며…”라고 밝혀 김대건 신부 일행의 조선 입국 장소를 ‘강경이 황산 동네’라고 전했다. 양업교회사연구소 차기진(루카) 소장은 ‘기해·병오 순교자 교황청 수속록과 김대건 신부 관련 기록’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통해 이런 증언은 김대건 신부 조선 입국 장소에 대한 최고의 사료가 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고 밝혔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사목 생활에 대한 신자들의 기억은 성인의 사목 활동 내용과 지역을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 역할을 한다. 그들은 성품은 물론 겉모습과 나이, 태도까지 떠올렸다. 김 프란치스코는 “김 신부가 조선으로 오신 후에 ‘서울’도 전교하시고 ‘용인 지방과 근처’에도 성사 주실 때 교우들이 극진히 사랑하여 찬양하더라”고 했고, 박 가이아나는 “신품에 올라 조선으로 돌아오시어 성사 주실 때 ‘남대문 밖 쪽우물골 나 베드로 집’에서 한 번 뵈오니, 연세는 28(25세의 잘못)이나 되고, 몸이 건장하시며 키 크시고, 성사 때면 규구대로 엄하게 하셨으며…”라고 인품과 용모를 기억했다. 성인의 출생지를 ‘충청도 면천’이라고 정확히 기술했던 이 베드로도 “(김대건 신부가) 도리를 강론하여 모든 교우를 훈회(訓誨)하심이 지극히 은근하였다”고 했다. 1846년 6월 5일 체포된 김대건 신부는 해주 감영과 서울 포도청에서 옥살이하고 그해 9월 16일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으로 순교했다. 옥중에서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 ‘마지막 회유문’에 대해 임 루치아는 “옥에 계실 때 모든 교우에게 편지 한 장을 써 보내셨더니 죄인도 보압삽고… 김 신부 옥중 편지 말씀에 ‘아직까지 나와 20여 명 교우들이 잘 있으니 미구에 우리가 전장에 나가겠다’ 하시더라… 병오년에 김 신부가 옥중에서 보내신 편지를 모든 교우와 같이 보았으나, 친필 문서는 어디 있는지 모르옵고…”라고 진술했다. 마지막 편지가 성인의 당부대로 신자들 사이에 필사돼 널리 읽혔다는 것을 헤아릴 수 있는 부분이다.이주연 기자 mik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