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

700여 폭 한지 두루마리에 성경필사한 101세 안의원 어르신

방준식 기자
입력일 2023-01-16 수정일 2023-01-17 발행일 2023-01-22 제 3328호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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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말씀 머금은 붓끝마다 기쁨의 은총 가득 스며들어
“주님께 드리는 작은 선물”
하루 7~8시간 필사에 매진
부산교회사연구소에 기증

1월 11일 부산 서대신성당에서 안의원 어르신이 부산 교회사연구소에 자신이 기증한 한지 두루마리 성경필사본 옆에서 소감을 밝히고 있다.

“앞으로 천국 문이 열리게 되면 저는 그저, 성당에 있는 꽃동산 한 모퉁이에 있는 조그만 민들레꽃 하나가 되고 싶습니다. 그게 제 소원이지요.”

만 101세. 젊은이들도 힘들다는 성경필사에 노년의 신앙을 바쳤다. 붓으로 한 획 한 획 주님의 말씀을 적어 내려가며 모든 힘을 다했다.

상수(上壽)를 누린 안의원(모세·부산 서대신본당) 어르신은 성경을 필사해 주님께 바친 한지 두루마리 표구(表具) 앞에서, 소년처럼 수줍은 미소를 머금으며 “민들레꽃이 되고 싶다”는 소원을 얘기했다. 바람에 흩날려 날아가는 민들레 씨앗처럼, 주님의 말씀을 머금은 자신의 작은 신앙이 세상에 널리 퍼지길 바란다는 의미일 것이다.

안 어르신은 지난해 11월 29일 부산교회사연구소(소장 한윤식 보니파시오 신부)에 자신이 만든 한지 두루마리 성경필사본을 기증했다. 그가 일일이 성경 구절을 붓과 먹으로 필사해 표구로 만든 한지 두루마리는 무려 총 700여 폭에 달한다. 그는 “남은 생애에 주님께 드릴 수 있는 작은 선물이라고 생각해 90세 되던 해부터 성경필사를 준비했다”고 밝혔다.

하루 7~8시간이 넘게 붓·종이와 씨름하는 성경필사를 하며 단단한 굳은살이 박혀버린 팔꿈치는 붕대로 동여맸다. 상수를 바라보는 노년에 감당하기 힘들 것 같은 강행군이었지만 그에게는 주님의 말씀을 손끝에서 느끼는 기쁨의 은총이 가득했다. “붓끝마다 신앙을 담아 온 정신을 집중했기 때문에 항상 마음이 즐거웠죠.”

그가 성경필사본을 부산교회사연구소에 기증하게 된 계기는 지난해 8월 부산 서대신본당 주임으로 부임한 주영돈(토마스) 신부가 성당 창고 한편에 놓여있던 그의 성경필사본을 발견하면서다. 주 신부는 “어르신의 간절한 신앙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으면 하는 마음에 교회사연구소에 기증하는 것을 추진했다”고 말했다.

1월 11일 부산 서대신성당에서 주임 주영돈 신부(오른쪽)가 성경필사본을 부산 교회사연구소에 기증한 안의원 어르신에게 안수하고 있다.

1922년 평안남도 진남포시(현 북한 남포특별시)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을 평양에서 보낸 안 어르신은 6·25전쟁 때 부산으로 피난을 온 실향민이다. 평양에서 국어와 한문교사로 교편을 잡았던 그는 죽을 고비를 몇 차례나 넘겨 남쪽으로 탈출하는 배를 가까스로 탈 수 있었다. 이후 평생을 교직에 몸담은 그는 1991년 딸의 권유로 서대신본당에서 세례를 받고 주님의 자녀가 됐다.

안 어르신의 절절한 신앙심은 그대로 후대에 이어지고 있다. 셋째 아들 안명용(베드로·67·부산 서대신본당)씨는 “저도 힘들어서 하지 못할 성경필사에 아버님이 전력을 다하시는 모습을 보고 신앙적으로 존경하고 있다”며 “저 자신도 자녀들에게 신앙 모범이 돼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된다”고 말했다.

필사본을 기증받은 부산교회사연구소 측은 이 같은 신앙의 모범을 신자들에게 더욱 널리 알릴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할 예정이다. 필사본 기증에 기여한 주 신부도 “아무에게나 주어질 수 없는, 어르신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은총이라고 생각한다”고 소회를 밝혔다.

방준식 기자 bjs@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