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말라 1,14ㄴ-2,2ㄷ.8-10 / 제2독서 1테살 2,7ㄴ-9.13 / 복음 마태 23,1-12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을 향해 위선적인 신앙 꾸짖으신 예수님 남에게만 엄격한 이중성 버리고 관용 베푸는 사제의 자세 갖추길
신앙생활의 큰 적, 위선과 이중성
산상수훈에서 예수님께서는 가난하고 못배운 백성들을 향해 7가지 행복을 선언하신 이후, 당대 부유하고 가방끈이 길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해 7가지 불행을 선포하십니다. 마태오 복음 23장 전체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날 선 발언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가르침이라기보다 도전장이요 고발장과도 같습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날카롭고 예리하며 강력합니다. 말씀을 듣고 있노라면 비슷한 처지에 있는 동업자 입장에서 섬뜩섬뜩한 느낌마저 듭니다. 공격적이고 자극적인 말씀 선포의 대상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지만, 그 말씀들이 온통 저만을 위한 맞춤형 가르침 같기도 합니다. 공격의 이유는 그들의 위선적인 삶과 가식적인 신앙이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데 있어 위선은 가장 암(癌)적인 존재입니다. 하느님께서도 가장 역겨워하시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지니고 있었던 가장 큰 문제는 가르침과 삶 사이의 엄청난 괴리감이었습니다. 그들은 ‘신앙 따로 삶 따로’라는 이중성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일전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적인 삶의 세 가지 측면에 대해 날카롭게 지적하신 바가 있습니다. 조용한 익명의 자선과는 반대되는 자랑하고 과시하는 자선, 골방에서의 겸손한 기도가 아닌 길모퉁이에서의 가식적인 기도, 산발(散髮)에다 침통한 얼굴로 하는 보여주기식 단식.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스꽝스러운 그들의 모습 한 가지를 더 신랄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마태 23,5) 성구갑이란 성경 구절이 들어있는 작은 통입니다. 유다인들은 작은 성구갑을 이마나 팔에 달고 다녔습니다. 하느님 말씀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며, 구체적인 삶 속에서 실천하겠다는 의미로 성구갑을 몸에 지니고 다녔겠지요. 그런데 정말 웃기는 것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성구갑은 유난히 크고 화려했습니다. 자연스레 사람들의 눈에 쉽게 띄었습니다. 크고 화려한 성구갑!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과시욕이 지나쳤습니다. 자신들의 신앙이 얼마나 깊은지를 자랑하고 싶은 허영심의 극치에 달했습니다. “이것 한번 봐주세요! 이 멋진 성구갑을! 내가 얼마나 하느님 말씀을 애지중지하는지, 내가 얼마나 성경 말씀을 극진히 여기는지를 말입니다.” 안타깝게도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자칭 가장 하느님 가까이 있는 사람들, 가장 하느님 말씀을 자주 접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실상 그들은 가장 하느님과 멀리 있는 사람들, 가장 하느님 말씀에 반하며 사는 사람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이유는 그들이 지니고 있었던 철저한 이중성, 과시욕과 허영심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공허한 의(義)를 가차 없이 폭로하십니다. 그들의 공허한 의는 예수님께서 온몸으로 보여주신 참된 의와 극명하게 비교·대조되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적인 신앙과 이중적인 삶, 그로 인한 철저한 몰락과 멸망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강력한 경고요 타산지석(他山之石)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내 발밑을 내려다봅니다. 오늘 내 발밑을 내려다보면 늦었지만 뼈저리게 깨닫습니다. 높은 자리! 그럴싸해 보이지만, 사실 다 부질없다는 것을. 높은 자리! 다 지나가는 것이라는 것, 결코 영원하지 않다는 것. 결국 그 자리는 낮은 자 되어 이웃을 섬기라고 주님께서 허락하신 자리라는 것.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 23, 11-12) 오늘 꽤나 거친 예수님 말씀을 묵상하면서 제 마음속이 뜨끔했습니다. 왜냐하면 한 말씀 한 말씀의 지향점이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저희 사제들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대한 교부들의 해석은 더욱 신랄하고 강경합니다. “신분으로 사제인 자는 많으나 행동으로 사제인 자는 적습니다. 자리가 사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제가 자리를 만듭니다. 장소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장소를 거룩하게 만듭니다. 모든 사제가 다 거룩한 것은 아니지만 거룩한 이는 모두 사제입니다. 그러므로 사악한 사제는 자신의 사제직에 의해 유죄를 선고받을 것이며, 사제직에서 오는 영예를 받지 못할 것입니다.” “거짓 사제들은 철저하게 이중적입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에게는 그 어떤 관용도 베풀지 않고 극도로 엄격한 삶의 규율을 지키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에게는 그다지 엄격하게 굴지 않습니다. 착한 목자는 자신과 관련된 일에는 엄격하고 준엄한 재판관이 돼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의 문제에 대해서는 온화하고 관용을 베풀 자세가 돼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참 제자들의 삶은 겉꾸미지 않아야 하며, 위선적이고 이중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요란스러운 의상이나 장식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스승님의 가르침에 따라 내용과 본질에 충실하기에, 외적인 것, 부차적인 대상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우리의 몸을 치장할 유일한 장식은 선행입니다. 그들은 거룩한 가르침을 묵상하며, 무슨 일을 하든지 영혼의 눈으로 볼 때 옳은 것인가를 생각하며 하느님의 계명을 지켰습니다. 그들의 유일한 옷자락 술은 자신들이 추구하던 예수님의 덕행이었습니다. “사목자들! 우리에게는 진정한 사목자들이 필요합니다! 아버지이자 형제인 사목자, 온유하고 참을성 있으며 자비로운 사목자를 원합니다. 내적으로는 물론 외적으로도 가난하며, 단순하고 소박한 생활을 즐기는 사목자를 찾습니다. 만일 한 사목자가 군주의 사고방식을 지니고 행동한다면, 우리 교회에 그보다 더 큰 악몽은 없습니다.”(프란치스코 교황)양승국 스테파노 신부,살레시오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