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책을 보내준다는 연락을 받으면 기쁘게 주소를 알려드린다. 이미 책을 사서 읽고 있을 때도 있다. 그럴 때도 기쁘게 받는다. 이미 산 책은 학생들에게 나눠 주는데, 학생들은 두 배로 좋아한다. 이번에도 그랬다. 내가 좋아하는 시인의 새 시집이 나왔다는 소식에 책을 샀는데, 시인이 책을 보내주셨다. “사랑하는 ~~~”이라고 적어서. 표현이 크지 않은 분, 감정에 헤프지 않은 분이라 진심인 마음 안에서 담뿍 보호받는 느낌이다.
책 뒤표지에 이렇게 적혀 있다. “사라지는 일에 하루하루 정성을 다하는 사람이 있다.//그것이 힘찬 삶의 의지일 수 있다는 것을/또렷하게 상기해 내면서// 파멸하고 추락하는 것이 실패하기. 물러서기.” 일부만 옮겨 적어 본다. 말 한마디도 허투루 하지 않는 진정성 있는 시인임을 잘 알기에 사라지는 일에 하루하루 정성을 다하는 것의 의미를 곰곰 생각한다.
시인은 이어서 “자신의 역량을 최소화하는 것이 인간에게 또 다른 방식의 영광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적었다. 우리는 자기 역량을 최대화하기 위해 얼마나 안간힘을 쓰는가. 공동체에서 봉사할 때, 조직에서 업무를 할 때, ‘난 이만큼이나 잘해요’, ‘내가 해야 잘할 수 있어요’라며 얼마나 자주 자신을 드러내는가. 타인이 자기 능력을 안 알아준다고 얼마나 서운해하는가.
사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나만큼 당신을 위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그러니 제발 알아달라고 매달린다. 다 당신을 사랑하고 위하기 때문이라는 말, 감정적인 폭력이다.
자기 역량을 최소화하면서 한 걸음씩 물러선다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될까? 아마 조금은 더 평화로워질 것이다. 좀 기운 빠진 듯싶어도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한결 여유로울 것이다. 내 정성을 몰라주어 서운하다고 눈물짓지도 않을 것이다. 참을성도 더 많아질 것이다. 좀 무심해도 괜찮고, 내 정성과 내 역량을 몰라주어도 아무렇지 않을 것이다.
우리를 각인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각자 잘 사라지기 위해 이 땅에 와서 잠시 깃들어 사는 거라 생각하면 모든 게 홀가분해진다. 잘 사라지는 일에 정성을 다하노라면 설령 내가 한 일을 남이 몰라주어도 괜찮다. 내 사랑을 상대가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다. 내 역량을 한껏 자랑하기 위해서 앞으로 나서서 잘난 척하지도 않을 것이다.
뒤로 물러서는 일의 온화와 온기를 생각해본다. 이 시의 언어는 또 나를 이렇게 기도처럼 구원한다. 때마침 ‘Ability & Disability’를 주제로 진행한 한 학기 수업을 마무리하는 자리에서 한 학생이 이렇게 후기를 적었다. “역량을 키우기 위한 자신의 노력이 누군가의 역량을 가로채거나 막지는 않았는지 돌아보게 된다”고. 역량을 키우는 일도 중요하지만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잘 가려내는 것도 중요하다고, 학기 초에 수업을 디자인하면서 품었던 선생의 뜻을 콕 알아낸 학생의 지혜가 고맙다.
문득 생각한다. 하느님이 내게 품으신 뜻은? 나는 그걸 잘 알아듣고 있는가? 혹 마음이 앞서 내게 주어진 역량보다 더 많이 욕심내진 않는가? 시를 읽는 일, 글을 쓰는 일이 영성을 가꾸는 길에 미미한 소금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매일 부끄럽게 고민하는 나날, 새로 시작한 대림 시기에 나는 또 첫 자리로 돌아가 물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