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주의 창

친밀한 관계와 폭력

박주헌
입력일 2024-05-22 수정일 2024-05-28 발행일 2024-06-02 제 3395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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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에서 존중과 배려가 필요하다고 하지만 존중과 배려에 대한 해석은 자의적일 수 있다. ‘사랑싸움’이라는 이름하에 제3자의 개입을 꺼리는 데이트폭력, 이별폭력은 사회적 쟁점이 됐고 그 범죄의 잔인함은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신문 사회면에 오르내리는 충격에 비해 제도적 차원에서 예방과 대책은 충분하지 않다.

몇몇 사람은 피해자들에게 사람 보는 안목이 없거나, 폭력을 당하면서도 관계를 끊지 못한 우유부단함을 비난한다. 자신이 비슷한 상황에 있다면 그런 일을 당할 만큼 어리석지 않다고 장담하기도 한다. 이러한 관점은 폭력 피해를 개인의 탓으로 해석하고 성별 권력이나 구조적, 사회문화적인 차원에서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낸다.

「2023 통계로 보는 남녀의 삶」에 따르면 2021년 여성가족부 산하 상담소에 접수된 데이트폭력 상담은 1만7137건, 스토킹 상담은 5454건에 이른다. 데이트폭력에서 남성 가해자는 2021년 1만975명, 스토킹으로 검거된 남성 가해자는 462명이다. 데이트폭력과 스토킹 피해자 대다수가 여성임을 보여준다. 젠더 폭력은 성별 권력의 불균형한 구조 속 여성을 인격적으로 대우하지 않고 남성의 소유나 정복의 대상으로 해석하는 문화와 연관된다.

데이트폭력의 가해자들은 폭력을 인지하지 못하고 ‘사랑해서 그랬다’고 말한다. 이는 폭력을 정당화하고 피해자에게 상처를 준다. 이러한 행동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상대방에게 고통을 주거나 희생을 강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별폭력 피해자들은 이별 이후가 아니라 데이트 과정에서 크고 작은 피해를 경험한 경우가 많다. 하지만 가족들까지 고통을 받을 것을 두려워해 이별하지 못하거나 안전한 이별의 방법을 고민한다.

이별폭력은 ‘만나주지 않으면 자살하겠다’고 협박하거나 집 앞에서 기다리는 등 스토킹과 맞물려 상대방을 괴롭힌다. 스토킹은 헤어진 연인 사이뿐 아니라 사귀지 않은 사이에서도 발생한다. 또 스토킹이 신체적 폭력을 수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피해가 가벼운 것은 아니다. 누군가에게 감시당하는 느낌은 불안과 공포를 초래하고 삶을 억압·파괴한다. 스토킹은 벌금형이라는 ‘솜방망이’ 처벌 때문에 가해자의 재범을 초래했고 피해자의 고통은 가중되었다. ‘스토킹범죄처벌법’의 제정으로 징역형 처벌이 가능해졌지만, 데이트폭력으로 고통받고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있으므로 교육과 캠페인을 통한 폭력에 대한 감수성을 높여야 한다.

로빈 스턴(Robin Stern)은 저서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2018)에서 가스라이팅 가해자의 심리를 분석한다. 스턴에 따르면 가스라이팅은 친밀한 관계에서 정서적으로 상대방을 감시·통제·조종하려는 행위다. 가해자들은 피해자들의 현실감과 판단력을 의심하게 만들면서 자신에게 의존하게 한다. 연애에서 가스라이팅은 파트너의 옷차림이나 일정을 간섭하고 일을 못 하게 하거나 이메일이나 메신저를 몰래 확인하는 행위다. 또한 피해자가 다른 사람들을 못 만나게 하거나 욕하고 비난한다.

피해자들은 가해자를 의심하지 못하고 낮은 자아존중감과 우울증, 무력감을 경험한다. 그들이 가스라이팅에서 벗어나려면 가해자의 행위에 문제를 제기하고, 이별 이후에도 자기 삶이 지속될 수 있고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야 한다. 또 혼자 고민하지 말고 가족, 지인, 경찰, 젠더 폭력 상담소에 도움을 청해야 한다. 교회에서도 인격적이고 평등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연애 윤리에 대해 방향을 제시하고 상담을 통해 피해자 구조와 치유를 도와야 한다.

가스라이팅은 부부, 부모와 자녀, 스승과 제자, 직장 선후배 사이에서도 발생한다. 몰지각한 소수의 문제가 아니다. 친밀한 관계에서 상처받기 쉽다는 인식 위에 상대방의 독립과 자유를 존중할 때 인격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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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_ 이동옥 헬레나(경희사이버대학교 후마니타스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