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강석진 신부의 세상살이 신앙살이] (357) 쪽지 <딸 X 며느리 O>

강석진 신부(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입력일 2016-10-25 수정일 2016-10-26 발행일 2016-10-30 제 3017호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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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신부님의 이야기입니다. 그 신부님의 본당 어르신들이 최근 들어 자주 선종하신답니다. 그래서 그 신부님은 저녁 시간이 되면, 장례식장을 찾아 가서 유가족들을 위로해 드리고, 빈소에서 가족들과 미사를 봉헌하고 오는 것이 중요한 일과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본당 여직원의 아버님이 선종하셨답니다. 그날 본당 일정을 다 마쳤더니, 저녁 9시가 되었고, 때마침 본당의 사무장님도 함께 조문을 간다고 하셔서, 잘됐다 싶어 두 사람이 함께 빈소가 있는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병원 마당에서는 본당 직원이 신부님을 기다리고 있었고, 신부님과 본당 직원 간에 반가움과 위로의 인사를 나눈 후 빈소로 들어갔고, 유가족들에게 인사를 드리고 영정 사진 앞에서 정성스레 조문을 했습니다.

이어서 신부님은 미사 제대를 차려 유가족들과 함께 빈소에 앉아 정성이 담긴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그 신부님 역시, 본당 직원의 유가족들에게 미사를 통해 하느님으로 부터 오는 따뜻한 위로를 나눌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그 신부님은 본당 직원을 살짝 불러 물었습니다.

“자매님, 그래 어떻게 돌아가셨어요?”

“네, 저희 아빠가 평소 지병을 앓으셨는데, 최근 갑자기 안 좋아지더니….”

“그렇군요. 암튼 미사 중에 우리 함께 기도합시다.”

시작 성가를 부르고, 본기도를 마친 후, 복음도 읽었습니다. 이어서 신부님이 강론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고인을 하느님 품에 맡겨 드리고, 유가족들을 위로하는 말씀 중에 “…고인의 자녀들을 보면서, 고인의 삶을 묵상해 볼 수 있습니다. 특히 고인의 따님이 평소 신앙인으로 충실히 살고 있는 모습을 통해 고인의 삶이…”라고 말하는 중에, 본당 직원이 눈물을 흘리다 말고,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다른 유가족 분들도 그냥 미소를 띠었고, 본당 직원의 남편 분은 당황한 모습을 역력히 보였습니다. 그런데 가장 당황한 분은 사무장님이었습니다. 사무장님은 급하게 메모지를 꺼내 뭔가를 쓴 후에, 임시 제대로 만든 식탁의 제대포 위에 쪽지를 올려놓았습니다. 쪽지 내용은, ‘<딸 X 며느리 O>’ 즉 다시 말해서, 딸이 아니라, 며느리라는 ‘사인’을 준 것입니다.

그 순간, 신부님은 머리가 갑자기 하얗게 되었고, 마치 달리기 선수가 스텝이 꼬인 듯 강론 내용이 뒤죽박죽되기 시작했답니다. 그리고 기억나는 것은 강론의 마지막 내용으로, ‘고인이 얼마나 좋은 분이었으면, 딸 같은 며느리, 며느리 같은 딸이 이렇게도 훌륭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아무튼 이렇게 마무리를 했답니다.

그 신부님 말로는 시아버지에 대한 호칭을 자연스레 ‘아빠, 아버지’라고 말했던 그곳 본당 직원 분의 표현을 들으면서, 많이 정겹기도 하고 따스하기도 했답니다. 마치 ‘딸이면 어떻고, 며느리면 어때’하는 듯 말입니다. 그날, 그 신부님은 호칭 자체가 관계의 깊이를 은연중에 대변해준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게 된 경험을 하셨습니다.

강석진 신부(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