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에 하느님은 에덴동산을 꾸미신 후 사람을 데려다 동산을 일구고 돌보게 하셨다(창세 2,15). 하느님은 사람의 협력자로 온갖 짐승과 새를 흙으로 빚으신 다음 사람에게 데려가셨다. 사람이 생물(living creature) 하나 하나를 부르는 그대로 그 이름이 되었다(창세 2,19). 협력자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사람과 생물 사이에 관계가 생겨난다. 그리해서 하느님이 흙으로 빚은 사람과 모든 생명들은 사람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이룬다. 최초의 이 생명 공동체는 각자 이름을 지닌 개체들이 서로 부르고 응답하며 소통하고 대화하는 관계였다. 소통 가능성은 공동체의 기본요소이기 때문이다. 창세기 3장에 여자가 뱀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등장하는 것은 그런 추론의 증거이다.
하느님이 세상을 만드셨을 때에 사람은 세상의 생명들이 모두 참여하는 공동체를 주도하고 그들을 돌보는 역할을 맡았다. 사람은 하느님과 대화했고 다른 생명들과 이름을 부르며 대화했으리라. 언제부터였을까, 하느님의 말씀은 사람에게 들리지 않고 다른 생명들과의 대화도 가로막혔다. 들리지 않는 존재에게 귀 기울이기란 참 어렵다.
특히 근대에 와서 인간의 보편적 권리를 확립한 법 체계는 인간 존엄은 들어 올렸지만, 다른 생명들은 모두 물건에 포함시켜서 일원화했다. 그래서 우리가 사회를 이루어 살아가는 이 공동체 속에 그들은 생명이 지워진 사물로 대상화됐다. 최근 동물의 권리가 이슈로 등장하면서 최소한 동물만큼은 ‘살아있는 물건’으로 특별한 지위를 인정하자는 법리가 나오기도 했다.
생태적 삶은 모든 생명 있는 존재와의 상호성을 깨닫고 존중하는 마음을 실천하는 데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생명을 지닌 다른 존재들과의 소통 능력도 잃어버렸고, 나아가 그들을 기본적으로 물건으로 취급할 뿐, 생명으로 대하지 않는 이 사회시스템 속에서 그들을 존중할 여지는 거의 없다.
우리가 물질적 풍요의 즐거움에는 익숙하지만 생명들의 풍요로움을 만끽해 본 체험은 없기에, 생태적 삶으로의 전환을 위한 상상이나 의지를 불러일으키기도 쉽지 않다. 그리스도인으로서는 하느님이 애초에 생명 공동체를 베풀어 주셨으니 성경을 읽으며 이제까지 지워져 있던 생명들의 흔적을 찾아보고, 말씀 속에서 거기 살아있는 그들 존재의 의미를 곰곰이 새겨보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생각으로 성경을 보니 예수님의 광야 생활이 달리 눈에 들어왔다. 예수님이 요한 세례자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후 맨 먼저 한 일이 광야에 나가 지내신 것인데, 성경은 성령이 내보내셨다고 전한다(마르 1,12, 마태 4,1). 성령이 이끄신 40일 동안의 광야 생활에 세 존재가 함께 한다. 유혹자인 사탄, 시중을 들어주는 천사, 그리고 들짐승들이다.
예수님은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다(마르 1,13). 사탄의 유혹은 인간 세상의 무한 욕망이다. 예수님은 성경의 기록을 내세워 이를 뿌리친다. 세속을 거부하고 광야에 사는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시는 모습은 바로 하느님 말씀대로 사는 최초의 생명 공동체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마르코복음은 예수님이 부활하여 제자들에게 나타나 이르신 말씀을 이렇게 기록한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every creature)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