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주말 편지] 우리의 만남은 / 구중서

구중서(베네딕토) 문학평론가
입력일 2018-05-08 19:37:07 수정일 2018-05-09 12:51:39 발행일 2018-05-13 제 3094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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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해 봄 충남 금산에 있는 산림수련원에서 한국작가회의 전국 회원들이 참여하는 연수회가 열렸다.

오후의 심포지엄이 끝나고 1박을 하면서 친목의 시간이 계속되었다. 많은 회원들이 잠을 자지 않고 숲길을 산책하고 마당에 모여 앉아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불렀다. 이튿날 낮에 해산을 하기에 앞서 폐회 인사의 말을 하는 몫이 내게 맡겨졌다.

“이번 우리의 만남은 서로를 풍요하게 했습니다.” 환송의 말 서두가 이렇게 시작되었다. 사람들이 듣기에 익숙지 않은 이 화두에 설명이 이어졌다. 흔히 사람들이 만났다가 헤어질 때에 “유익한 시간이었다”고 말한다.

이 때 무익에 대비되는 ‘유익’이라는 말은 이해타산의 의미를 띠는 것이다. 이와 달리 “서로를 풍요하게 했다”는 말은 순수하게 인간 존재의 본질 차원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라고 내가 설명을 했다.

마당에 빼곡히 들어선 시인 소설가들이 듣기에 생소하지만 좋은 뜻으로 수긍한다는 듯이 미소를 짓기도 했다.

나는 이 ‘풍요’의 논법을 제2차 바티칸공의회 「사목헌장」에서 발견해 기억하고 있다. 어느 민족 어느 나라의 전통 관습들도 서로 배척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가 여러 형태의 문화와 만나는 것도 “서로를 풍요하게 해 준다”는 것이다.

교회가 신자들에게 전하는 회칙이나 훈령을 근래에는 ‘권고’라고 하는 것을 보게 된다. 명령이 아닌 대화의 인상을 느끼게 한다.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고 보시니 좋았다고 성서의 창세기에 씌어 있다. 당신 모습대로 창조한 사람들에게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다. 사랑을 하고 안하는 자유마저 주셨다. 자기 결정권마저 지니는 인간은 비로소 완벽하게 존엄한 존재이다.

사람이 혼자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알 수 없고 간섭할 수도 없다. 이것이 ‘자유’의 기본 원리이다. 이처럼 기본인권을 지닌 사람들 사이의 사랑과 소통은 먼저 ‘대화’를 방법으로 택하게 된다.

대화는 그 누구도 대상에서 제외할 수 없다. 나를 공격적으로 비판하는 사람과도 대화해야 한다. 잘못과 잘못을 범한 사람도 구분해서 생각해야 한다. 잘못을 범한 이에게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대화해야 하는 까닭은 “진리를 사랑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역시 교회의 권고 「일치와 발전」에 씌어 있다.

고맙게도 섭리의 배려가 오늘날 우리의 분단된 한반도에서 남과 북이 대화를 하도록 권고하였다. 이 권고를 알아들은 남과 북의 겨레는 착하고 구원받을 희망을 지니고 있다.

일찍이 함석헌 선생이 말했다. 2차 세계대전 후 한반도의 남북 분단은 궁극적으로 세계의 평화를 타결할 소명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소명을 지닌 수난의 역사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우선 서로 만나야한다. 만나야 대화를 할 수 있고 사랑도 할 수 있다. 진리를 사랑해야 하는 근본 동기에 따라 대화를 하면 못할 일이 없다. 사람들의 일은 하기 나름으로 기적처럼 잘 될 수도 있다.

올해 4월 27일의 남북 정상 ‘판문점 선언’이야말로 1년 전의 현실에 비하면 기적과 같은 일이다. 이제 경계해야 할 것은 ‘만남’ 자체를 꺼리며 민족과 세계의 화해와 평화 추진을 비관하는 듯한 일부 정파의 역사 역행이다.

그러나 보편적 가치로 중심과 주류를 이룬 쪽에서는 ‘일치 안의 다양성’으로 포용해 대화를 하며 함께 걸어가야 할 것이다.

■ 외부 필진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구중서(베네딕토)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