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 내력이나 학벌 등으로 본다면, 그가 선택할 수 있는 화려한 삶은 무궁무진했다. 아버지는 영국 귀족 가문 출신이었고 어머니는 왕족의 피를 이어받았다. 또한 아버지는 노동당 국회의원에 외무부 차관, 남동생은 BBC의 유명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수산나도 옥스퍼드대에서 수학한 재원으로 의사 약혼자까지 있었다. 하지만 1959년, 당시 23세의 젊은 스코틀랜드 여성은 한국 선교에 투신하기로 했다. 어떤 세속적인 잣대도 들이대지 않고 단박에 빠진 사랑이었다.
■ 예수가 뭐길래
신앙 안에서 성장하진 않았다. 태어나자마자 성공회 세례를 받았지만 마르크스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은 부모님이 그리스도교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숙사에서 지내던 고등학생 시절, 심심풀이로 읽으려 추천받았던 책이 「그리스도의 생애」였다. “어? 예수란 인물, 상당히 매력적인걸.” 곧바로 친구에게 성경을 빌려 읽기 시작했다. 하룻밤새 신약성경을 통독했다.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소리칠 뻔했다. 하지만 감정에 치우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다음날엔 온종일 테니스를 쳤다. 소용없었다. 밤이 되자 다시 성경을 펼쳤다. 그리곤 주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부모님은 그가 그리스도교 신앙을 갖는 것도, 성공회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것도 반대하지 않고 오히려 존중해줬다고 한다.
수산나는 예수님의 사랑을 알게 된 순간부터 이 기쁜 소식을 땅 끝까지 전하고 싶었다. 집 지하실에서 ‘빛을 향하여’라는 이름의 선교 준비 모임을 열기 시작했다. 우연히 들은 한국교회사 특강. 평신도들이 자발적으로 신앙을 받아들이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피 흘리며 스러져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너무나 감동했다. “그래, 한국으로 가자.” 마리아 하이센베르거(하 마리아, 한국SOS어린이마을 초대원장)와의 인연으로 수산나 역시 서정길 대주교(당시 대구대목구장)의 초청을 받아 한국행 배에 올랐다.
■ 그래서 뭘 했길래
독일 함부르크에서 부산으로 향하는 배. 피아노가 없어 연습을 못하는 대학생들을 위해 7대의 피아노를 싣고 탄 화물선이었다. 함께 한국으로 향하는 열 명의 사제·수도자·평신도 선교사들도 피아노를 가져가기 위해 편안한 비행기가 아닌 5주 넘게 소요되는 화물선 이동에 응해줬다.
효성여자대학교(현 대구가톨릭대학교)에서 영어와 프랑스어를 가르치면서 기숙사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집이 없어 다리 밑에서 살고 있는 가족들과 고아원에서 도망쳤지만 폭력배들에게 착취를 당하며 사는 구두닦이 아이들이 눈에 밟혔다. 서정길 대주교로부터 그들과 같이 살아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고향 친구들의 도움으로 대구 삼덕성당 옆에 집을 마련하고 폭력배의 소굴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나왔다. 아이들의 옷을 빨 때 뜨거운 물에서 도망가려고 후드득 뛰어오르는 벼룩 떼를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 아이들은 나중에 SOS어린이마을 각 가정의 ‘형’들이 됐다.
수산나는 젊은 여성들의 자립에 더욱더 헌신했다. 기술원을 세워 전인적인 교육은 물론 양재, 미용, 기계뜨개질 등의 기술을 가르쳐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왔다. 한국에는 ‘사회복지’라는 개념도 자리 잡지 않은 때였다. 이 대구가톨릭여자기술원은 현재도 ‘가톨릭푸름터’로 운영되고 있다. 그의 발걸음 발걸음은 대구지역 사회복지의 모퉁잇돌이 됐다. 가톨릭시보(현 가톨릭신문) 사장으로 바쁜 와중에도 자주 기술원에 들른 김수환 신부(故 김수환 추기경)와 함께 배급받은 금죽(옥수수죽) 혹은 수제비로 끼니를 때우며, 아이들이 교도소 수용자들을 위한 연극을 할 수 있도록 돕기도 했다. 김 신부가 악취와 굶주림으로 쓰러져가는 시립희망원 수용자들을 살리기 위해 미군부대에서 받은 음식을 나눠줄 때에도 동행했다. 대구·경산지역 농민들을 돕기 위해 농장을 만들어 운영하는 데에도 힘을 보탰다. 농장은 결국 문을 닫아야 했지만, 이를 디딤돌로 세워진 무학중·고등학교는 지금까지도 지역교육에 든든한 거름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