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세례 축일 제1독서(이사 42,1-4.6-7) 제2독서(사도 10,34-38) 복음(마태 3,13-17) 죄인들과 함께 인간으로부터 세례 받으신 사건은 죄로부터 해방과 구원 이루시려는 의로움의 시작 ‘하느님 마음에 드는 아들’ 예수님 신원이자 정체성 주님께서 선택하시고 성령과 힘 부어주심을 선언
대체 그분은 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학술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하던 학부 3학년 무렵, 몸살처럼 제 안에 들어온 질문이었습니다. 오로지 고통의 길에 들어서려고 작심하신 듯 죄인들과 함께 하시고, 가난하고 나약한 이들에게만 특별한 애정을 갖는 위태로움을 받아들이기 난감했고 그분에 대해 좌절감을 느낄까봐 두려워서였습니다. 그렇게 신학에 입문한지 30년이 넘은 지금에야 비로소 그 위험해보이던 예수님 일생은, 모멸이나 굴욕, 실패가 결코 ‘패배’의 동의어가 아님을 우리에게 몸소 보여주는 기쁜 소식임을 깨닫고, 그 어처구니 없는 사랑에도 조금씩 동의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죄인들 틈에 끼어서 죄 사함의 세례를 받으시며 공생활을 시작하시고, 죄인들 틈에 끼어 십자가형을 받으심으로써 공생활을 마치신 예수님의 삶은 역설적이게도 누구도 패배시키지 못했던 구원과 해방의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오늘 전례의 본문들은 죄인들과 함께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이 과연 누구이신지 그분의 정체성을,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이 드는 아들”(마태 3,17) 이며 하느님께서 “선택한 이,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이사 42,1) 라고 장엄히 선포합니다.
■ 복음의 맥락 지난 주에 이어 이번 주일에도 유사한 주제가 지속됩니다. 동방에서부터 빛나는 별을 보고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러 온 박사들처럼(마태 2,1-2) 이제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기 위하여 세례자 요한이 있는 요르단 강으로 몸소 오시는 여정을 감행하십니다. 두 사건 모두 긴 여행과 이를 통한 ‘공적 드러남’(公顯, Epiphany)이라는 주제로 일맥상통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30년간의 숨은 생활과 침묵을 뒤로 하고 이제 공개적인 생활의 시작과 그 결단을 알리는 공적인 드러남, 즉 두 번째 ‘공현’이었던 것입니다. ■ 내 마음에 드는 아들 예수님께서 요한 세례자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신 사건은 요르단에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고 요한 자신에게도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마태오복음서는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마태 3,14) 하며 당혹스러워하는 요한의 모습을 언급합니다. 요한의 이러한 주저함에 예수님은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15절)라고 대답하십니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신학적 주제가 선언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제 공생활을 시작하시려는 예수님은, 물속까지 내려가는 행위를 통해 죄인들을 위한 구원사업에 돌입하시고, 공생활의 마지막에도 역시 죄인들과 함께 십자가에 죽으시고 땅 속 깊이까지 내려가심으로써 모든 죄로부터의 해방과 구원을 이룩하십니다. 이것이 당신이 ‘이루어야 할 모든 의로움’이신 것이고, 따라서 공생활 시작인 세례 때 언급된 ‘의로움을 이룸’은 공생활 마지막에 ‘이루실 의로움’의 시작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김혜윤 수녀,(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총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