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희생 제사 재현한 성찬례, 신앙생활의 원천이자 정점 성체성사의 본질은 ‘그리스도 현존’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결함함으로써 복음화 사명 수행할 영적 힘 얻어 희생 제사로서 성체성사의 의미 알고 주일미사의 중요성 소홀해져선 안 돼
교회는 매년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이뤄진 성체성사의 제정과 신비를 기념하는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을 기념한다. 이는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후 첫 번째 목요일이나 일요일에 지켜지는데, 한국에서는 첫 번째 일요일에 지낸다. 그리스도 신앙의 핵심인 성체성사를 기념하는 뜻깊은 날을 맞아 성체성사를 살아가기 위한 마음가짐과 자세를 살펴 본다.
■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성사 전 세계적인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은 미사 중단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경험했다. 감염의 위험으로 인해서, 영혼의 양식인 성체성사로부터 강제로 ‘거리두기’를 해야 했던 그리스도인들은 한편으로는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모시고자 하는 간절한 염원을 체험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거듭된 ‘거리두기’로 인해 점차 주일미사, 성찬례의 은총이 없이도 신앙생활이 가능할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기도 했다. 실제로 적지 않은 신자들이 성당에 가지 않아도, 미사에 참례하지 않아도, 공동체의 구성원들과 직접 만나고 친교를 나누지 않아도,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성찬례에 참례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됐다. 이러한 인식의 확산은 최근 평신도신학연구소인 우리신학연구소에서 실시한 ‘팬데믹 시대의 신앙 실천’ 설문조사에서 실증적으로 드러났다. 이 조사에 의하면, 소수의 열심 신자층을 제외한 많은 신자들의 경우, 주일미사 참례 의무에 대해서 느슨해진 의식을 갖게 된 것으로 나타났다. 즉, 미사에 다소간 형식적으로 참례하거나, 또는 가끔 미사에 빠지곤 하는 대다수 신자들은 코로나19로 인한 강제적인 ‘거리두기’ 이후 주일미사 참례 의무에 대한 투철함이 상당히 퇴색한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앞으로 팬데믹(세계적 감염병 유행) 현상이 되풀이될 공산이 매우 크고 따라서 지금까지와 같은 경험을 어쩌면 앞으로도 종종 하게 될지도 모른다. 따라서 성당 공간과 대중적이고 집합적인 전례 및 행사 중심의 신앙생활과는 달리, 개인과 가정 등 소규모 공동체를 중심으로 하는 일상적 신앙실천의 대안들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요체인 전례와 성사, 주님의 몸과 피를 모시는 성찬례의 의미와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 교회는 성체성사로 살아간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상 희생 제사를 앞두고 최후의 만찬에서 제정한 성체성사와 교회의 불가분의 관계를 다시 한 번 조명하는 회칙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Ecclesia de Eucharistia)를 2003년에 반포했다. 이 회칙은 성체성사 각 부분의 신학적 의미를 자세하게 설명하기보다는, 성체성사의 가장 본질적인 신학적 원리인 구원 역사의 현재화와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에 대해서 말해 준다. 즉, 회칙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사명을 이어받아 온 세상을 복음화하는 소명을 갖고 있으며, 성체성사는 그러한 복음화 사명의 원천임을 일러준다. “교회는 십자가의 영원한 희생 제사에서, 그리고 성찬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결합됨으로써 자신의 사명을 수행할 영적인 힘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성찬례는 모든 복음화의 원천이며 정점입니다.”(회칙 22항) ‘성체성사와 교회의 관계에 관한’ 이 회칙은 가장 핵심적 교리이며 ‘교회 생활의 중심에 서 있는’ 성체성사의 ‘놀라움’을 되살리기 위한 것이다. 특히 이 회칙은, 일부 지역에서 성체 조배가 거의 사라지고 성찬의 신비를 축소하거나 희생 제사가 아닌 단순한 형제애의 잔치로 거행하거나, 직무 사제직의 필요성이 가려지는 등 성체성사에 관한 오류와 혼란이 있는 가운데 이에 대한 올바른 교회 가르침을 다시 한 번 확인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반포됐다. 코로나19로 인해 자칫 전례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면, 교회는 이에 대한 경각심을 갖고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재현하는 성찬례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 일깨울 필요가 있다.박영호 기자 young@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