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모 신심 강조한 프랑스 선교사들
양업교회사연구소 차기진(루카) 소장은 박해기 성모신심을 크게 두 시기로 구분한다. 교회 창설 이후 자발적인 성모 신심이 보편화되어가는 시기와 1836년 초 프랑스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하면서 성모 신심 단체의 도입과 확대가 신자들 신심 함양에 영향을 주는 시기로 구분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프랑스 선교사들은 1836년 1월 모방 신부의 조선 입국에 이어 샤스탕 신부, 앵베르 주교 등이 차례로 입국해 1839년 기해박해 때까지 활동했다.
앵베르 주교는 1838년 12월 1일 ‘성모 마리아’를 조선교구 주보로 선정한 뒤 교황청에 허락을 요청했고,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은 1841년 8월 22일 ‘성모무염시잉모태’(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를 ‘성 요셉’과 함께 조선교구 주보로 승인했다.
차 소장은 「박해기 한국천주교회 순교자들의 성모 신심」 연구에서 “성모 마리아를 주보로 선정한 사실은 이후 신자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이 사실은 프랑스 선교사들의 가르침과 함께 자발적인 성모 신심이 더욱 활성화되는데 기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병인박해기에 와서는 묵주기도를 통한 자발적인 성모 공경이 더욱 보편화됐고, 성모 신심은 순교자들에게 내세에 대한 희망을 주었다. 병인순교록 등을 참고할 때 많은 순교자가 옥중에서 묵주기도를 바치거나 순교할 때 성모 마리아를 외친 내용이 보인다. 이를 통해 일반 신자들 사이에 스며져 있던 성모 신심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선교사들의 가르침과 함께 이들이 새로 도입한 성모 신심 단체, 신자들에게 보급된 한글 기도서들도 성모 공경과 신심을 북돋우는 데 영향을 미쳤다.
■ 김대건 성인과 최양업 신부의 서한에서도 확인 돼
서한과 기록에 드러난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의 성모 영성도 되새겨 볼 만하다.
남아있는 25통의 김대건 신부 서한을 살펴볼 때, 김 신부는 편지에서 총 9번에 걸쳐 성모 마리아께 특별히 의탁하는 면모를 보인다.
“예로부터 동정 성모의 보호하심에 달아 드는 자는 누구도 버림을 받지 않는다고 확신하면서 서문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저는 우리들의 유일한(천주님 다음으로) 희망이신 성모님의 상본을 보이며, ‘겁내지 말라. 우리를 도우시는 성모님이 여기 계신다’라며 말로 할 수 있는 데까지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였습니다” 등 구절에서 성모 마리아에 대한 확신과 의지를 찾을 수 있다.
최양업 신부는 일찍이 성모성심회에 가입하려 한 적이 있으며 신자들에게도 성모 신심을 함양하도록 가르쳤다. 스승 신부에게 성모 상본을 많이 보내달라고 자주 청했던 최 신부는 신자들에게 묵주를 만드는 도구나 자료들도 많이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신자들에게 성모 공경에 힘쓰도록 하고, 또 자주 묵주기도를 바치도록 가르치려는 목적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