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느님의 사제, 하느님의 일꾼
순교기념관에 전시된 순교자들의 유품을 둘러보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두 순교자의 순교터가 나타났다. 이곳은 두 순교자가 순교한 곳이자 전쟁이 끝날 때까지 가매장 됐던 자리다. 두 순교자는 전쟁의 긴박한 상황 중에서 공산군의 총부리 앞에서도 당당하게 하느님의 사제임을, 그리고 하느님의 일꾼임을 밝히고 순교했다.
1950년 6월 28일에는 이미 도림동본당 관할 지역은 공산군에 의해 점령됐다. 본당 사제와 신자들은 공산군의 박해를 피해 현재 의왕 하우현본당으로 피난을 갔다. 공산군의 박해를 피할 수 있었지만, 이현종 신부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두고 온 성당과 아직 성당 인근에 남아 있는 신자들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 이 신부가 성당으로 돌아가 본당을 지키고 신자들을 돌볼 결심을 하자, 당시 본당 주임이었던 박 신부는 좀 더 정세를 보고 가자고 만류했지만, 이 신부의 열의를 꺾지는 못했다.
성당에 돌아온 이 신부는 인근의 신자들을 방문하며 병자성사 등을 집전했고, 서봉구 형제와 매일 미사를 봉헌하며 성당을 지켰다. 7월 3일 순교하던 그 날도 두 하느님의 종은 평소처럼 미사를 드리고 성당과 신자들을 돌보고 있었다. 종교를 탄압하던 공산군은 성당을 찾아와 기물을 빼앗고 이 신부의 옷과 신발마저 가져가곤 했다. 언제든 생명까지도 빼앗길 위험 속에 있었지만, 이 신부는 그날도 흐트러짐 없이 로만칼라에 수단을 입고 성무일도를 손에 들고 사제관을 나서고 있었다.
“너는 무엇 하는 사람이냐?”
“나는 이 성당의 신부요.”
성당에 나타난 30여 명의 공산군이 위협적으로 묻자 이 신부는 의연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공산군들은 “너는 인민의 착취자가 아니냐”며 총을 쐈다. 이 신부는 총탄을 맞고 쓰러진 중에도 공산군을 향해 “당신들이 내 육신을 죽일 수 있어도 내 영혼까지 빼앗아 갈 수 없을 것이오”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공산군은 다시 총을 난사했다.
그때 총소리를 들은 서 형제가 뛰어 나오자 공산군은 다시 물었다.
“너는 무엇 하는 사람이냐?”
“나는 이 성당의 일꾼이오.”
공산군은 그 대답을 듣자마자 총을 쏴 즉사시키고 돌아갔다. 총에 맞아 쓰러진 두 사람을 근처의 신자들이 발견했을 때 이 신부의 의식이 아직 남아 있었다. 신자들이 이 신부를 돌보려 하자 이 신부는 “사람들이 죽은 나의 모습을 보면 좋지 않으니, 얼굴을 닦아 달라”고 부탁하고 죽어 가는 중에도 “서 마리노가 죽었으니 그를 위해 기도를 많이 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이 신부와 서 형제는 순교터에 가매장했다가 1953년 10월 이 신부의 유해는 용산 성직자묘지로, 서 형제의 유해는 광명리 본당 묘지로 이장했다.
두 순교자는 어떻게 죽음 앞에서도 두려움 없이 당당할 수 있었을까. 경당 내 이 신부 조각상의 시선이 그 답을 말해주는 듯했다. 이 신부가 흔들림 없이 바라보는 그 끝에는 밝게 빛나는 십자가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