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처녀를 맞으려면 아직 두 발을 딛고 창밖을 내다보며 기다려야하는 때. 쉽게 물러가지 않겠다는 동장군 탓에 ‘빛나는’ 졸업장과 꽃다발을 받아든 볼들이 얼어붙는다.
2월이 주는 이미지 중의 하나는 바로 ‘졸업’이다. 코로나19가 아니었다면 올해도 우리의 2월은 이런 풍경 속을 지나고 있을 것이다. 이맘때가 되면 나의 뇌리에는 고교 졸업식 때의 한 가지 사건이 절로 떠오른다.
내가 서울 혜화동의 동성고교를 졸업한 것은 1972년 2월. 동성고 46회 졸업식 행사는 강당에서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많은 시상이 이어졌고 이젠 거의 마지막인 ‘1년 정근상’ 시상 차례, 동기생 H군이 대표로 연단 앞에 올라섰다.
그런데 H군은 상을 받고는 뒤로 돌아 객석을 향해 상장을 든 두 팔을 높이 들고 흔드는 것이었다. 순간, 졸업생석과 하객석에서는 “와-”하고 웃음과 환성이 터져 나왔다. H군은 내려오면서 한 번 더 두 팔을 흔들었고 장내에는 폭소가 터졌다. 그러고 나서는 웬일인지 장내가 다소 어수선하고 산만해졌다.
곧 이사장인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격려사를 하러 연단으로 나오셨다. (동성학교는 당시 재단법인 천주교 서울대교구 유지재단 소속, 지금은 학교법인 가톨릭 학원 소속이다)
추기경님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추기경님은 준비해온 격려사 메모지를 덮었다. 그리고는 즉석연설을 시작했다. 그 내용인즉, 뜻깊은 졸업식장에서 진지한 구석이라곤 없이 경망하게 구는 졸업생들의 태도를 지적하고 꾸짖는 것으로 기억한다. 때와 장소를 구별하지 못하는 그런 자세로 어떻게 이 세상에 나가 올바로 살겠느냐는 말씀도 하셨다. 추기경님은 졸업생들을 격려하시려다 시종일관 꾸중을 하시게 됐고, 46회 동기생들은 단체로 추기경님에게 꾸중을 들었다. 일찍이 없었던 일이었다. 나중에 추기경님이 그렇게 화를 내시고 꾸중하시는 건 처음 보았다면서 놀라는 이들이 많았다.
문제는 ‘사건’이 거기에서 그친 게 아니었다. 졸업식 행사가 끝나고, 교무주임 선생님이 H군을 교무실로 불렀다. 그리고는 H군을 심하게 질책했다. “너 때문에 추기경님 앞에서 학교가 무슨 꼴이냐”는 것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선생님은 졸업장을 손에 든 제자의 두 뺨을 여러 차례 때렸다. H군의 얼굴이 벌겋게 부어올랐다.
그로부터 15년의 세월이 흘러, 동성고교는 개교 80주년을 맞았다. 성대한 본 행사가 끝나고 저녁에는 시내의 큰 호텔에서 총동문회가 주최한 뒤풀이 행사가 열렸다. 김추기경님도 오셨다.
김추기경님은 이 학교의 이사장일 뿐 아니라 동문(16회)이기도 했다. 동문들의 행사에는 언제나 지지와 후원을 아끼지 않으셨고 당신의 시간을 쪼개 웬만하면 동문행사에는 참석하시려고 애를 썼다. 동문들과 어울릴 때면 언제나 유쾌한 모습이었다. 80주년 뒤풀이 기념식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김추기경님은 행사장 전면의 의자에 앉아 계셨다. 그런데 바로 앞에서 사회자 마이크를 잡은 이가 다름 아닌 H군이었다. 대기업의 유능한 직원으로 일하고 있던 H군, 진행하던 중에 15년 전 졸업식 행사장의 해프닝과 이 때문에 교무주임 선생님에게 맞았던 일화를 소개했다.
바로 옆에서 듣고 계시던 추기경님은 H군이 맞았다는 이야기를 전하는 순간, 그야말로 깜짝 놀라며 당황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H군이 잠시 말을 쉬는 순간, 김추기경님이 일어나셨다. 그리고 H군에게 허리를 굽히며 사과하는 것이었다. “황동문, 미안합니다”라는 말과 함께.
이번에는 그 자리에 참석한 동문들이 모두 깜짝 놀랐고 당황해 어쩔 줄 몰랐다.
그것이 김추기경님의 힘이었다.
신문기자로서 인터뷰를 하거나, 동문 언론인 모임인 혜화클럽에서의 만남 등 여러 기회를 통해 김추기경님을 뵈었던 나는 “과연 어떤 분이라고 해야 할까”하고 곰곰이 생각해본 적이 있다. 그리고는 내심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나 역시 이를 삶의 레일로 삼기로 한 바 있다.
‘진지하고도 유쾌하며, 소박하되 격조가 있고, 소신이 있으면서도 겸손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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