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을수록 더해지는 십자가 무게, 예수 수난의 의미를 묻다 나무 십자가 골라 짊어 지고 14처까지 기도하며 걷다 보니 예수님의 넘어지심도 떠올라 십자가의 길 중 청하는 기도 ‘제 상처를 없애 주소서’ 아닌 ‘주님 상처 깊이 새겨 주소서’
십자가의 길 기도는 연중 어느 때나 바칠 수 있는 기도지만 특히 사순 시기에 신자들이 많이 드리는 기도다. 예수님의 수난 여정을 따라가며 깊이 묵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에 위치한 갑곶순교성지(이하 갑곶성지)에는 나무 십자가를 골라 직접 지고 십자가의 길을 체험할 수 있는 특별한 야외 십자가의 길이 있다. 사순 시기 시작에 앞서 2월 5일 기자가 갑곶성지를 찾아 십자가를 지고 기도하며 예수 수난의 의미를 되짚어봤다.
■ 적막한 겨울 성지 며칠 전 내린 눈이 소복이 쌓여 있는 성지는 고즈넉하기 그지없었다. 쌀쌀한 날씨 탓인지, 코로나19 탓인지 인적이 드물었기에 조금 적막하기는 했지만 예수 님과의 오롯한 만남을 갖기에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성지 입구로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성모상이다. 그 다음 성물방과 기념성당, 쉼터를 지나 계단을 내려오면 십자가의 길이 펼쳐진다. 십자가의 길 시작 지점에는 두 줄기로 갈라져 자란 ‘세쌍둥이 은행나무’가 있다. ‘이 곳에 서 있는 세 그루 은행나무는 서로 다른 뿌리에서 나왔음에도, 마치 쌍둥이처럼 두 줄기로 갈라져 닮아 있습니다. 마치 그리스도와 함께 계신 세 분의 순교자처럼 말입니다. 어쩌면 십자가의 길을 기도하려는 분께 십자가를 나 혼자 지고 간다는 생각을 버리라고 말하려는 뜻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안내문에서 말하는 세 분의 순교자란 지금의 갑곶순교성지, 옛 갑곶진두(갑곶나루터)에서 효수된 박상손, 우윤집, 최순복이다. 이들은 1871년 신미양요 당시 미국 군함에 왕래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했는데 안타깝게도 이들의 세례명, 후손, 생애 등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믿음을 지켜낸 세 순교자들을 통해 오늘날 우리들의 믿음에 대해 생각하고 또 위로와 힘을 얻을 수 있기에 인천교구는 2000년 이곳을 성지로 조성했다.■ 내가 질 십자가를 고르다
세 순교자들의 믿음에 대해 잠시 묵상한 후 본격적으로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기 위해 십자가가 놓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크기와 무게가 다른 여러 개의 나무 십자가들이 놓여 있었다. 어린이들이 질 수 있는 짧고 작은 십자가로부터 한 번 들어보는 것도 버거운 크고 무거운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십자가들이 있어 선택의 폭이 넓었다. 예수님의 수난을 더 깊이 체험하려면 크고 무거운 십자가를 지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14처를 계속 지고 가자면 무게 때문에 오히려 분심이 들 것 같아 이것저것 비교한 끝에 적당한 크기와 무게를 지닌 십자가를 골랐다. ‘여기서나마 제 뜻대로 십자가를 고를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제가 가는 이 십자가의 길이 끝없는 길이 아님을, 혼자 가는 길이 아님을, 무의미한 길이 아님을 믿게 해 주소서.’ 안내판에 적힌 기도문이 마치 내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지난해 전 세계인 모두는 코로나19로 인해 1년을 거의 사순 시기처럼 보내야 했다. 사순 시기의 끝은 찬란한 부활로 이어지건만 아직 부활의 봄은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평범한 일상이 고행이 되어 버리고, 당연하게 누렸던 모든 것들을 포기하는 고통을 겪어야만 했던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오히려 시간이 길어지면서 점점 지치고 힘들어지는 지금, 이럴 때일수록 우리의 고통과는 비할 수도 없는 예수님의 고통에 대해 생각하며 기도하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십자가의 길이 끝없는 길이 아님을 알기에 십자가를 지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갑곶성지 십자가의 길은 울창한 나무들 사이에 길을 조성해 마치 숲길을 산책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또한 각 처 사이의 거리가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아 기도하며 걷기에 적당하다. 기자는 이 성지를 예전에도 여러 번 찾은 적이 있다. 봄에는 꽃들이 만발해 참으로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했는데, 겨울에도 마른 나무들과 낙엽, 곳곳에 쌓인 눈이 주는 운치가 있었다.김현정 기자 sophiahj@catimes.kr,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