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가운데 저는 마음을 움직이는 시편 낭송을 제일 좋아합니다. 미사 중에 시편을 노래로 바치는 화답송은 보통 미사 전례에서 우리가 들은 하느님의 말씀에 대해 하느님께 올려드리는 ‘응답’(anabasis)이라는 측면만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화답송 본문 자체가 이미 하느님 말씀이기 때문에 또 다른 ‘선포’(katabasis)가 될 수도 있다는 점, 그리고 그렇게 선포된 하느님 말씀을 대답으로 바치기에 앞서 내 안에서 내면화하는 ‘묵상’(diabasis)이 될 수도 있다는 점 등 화답송은 그 자체로 아주 복합적인 기능을 수행합니다.
시편에는 기쁨과 찬미, 환호의 시편도 있지만, 끝없는 슬픔과 외침, 절규를 표현한 시편도 있고, 때로는 남을 저주하는 시편까지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마음을 날 것 그대로, 혹은 승화시켜서 보여주는 시편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도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게 만들고, 또 그래서 이 시편을 노래로 바칠 때 노래하고 듣는 모든 이들의 마음마저 움직이게 만들지 않나 합니다. 물론 아쉽게도 지금 우리의 전례 시편은 우리의 마음을 ‘시’(詩)로 보여주기에는 아주 조금 아쉽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몇 번 화답송을 만들어 본 적이 있는데, 지금의 시편 번역문이 시나 노랫말로 만들어지기에는 너무나도 딱딱하다는 인상을 받아 결국 몇 번 만들다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새로운 성가책이 만들어질 때에 음악가들과 시인들, 우리말을 잘 아시는 분들이 모여서 화답송 시편도 함께 다듬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그래도 아쉬운 대로 전례 안에서 이 시편이 우리 마음 안에 잘 들어올 수 있도록 시편 낭송을 하시는 분들께 몇 가지 부탁을 드립니다. 전례 안에서 시편 낭송을 하는 분들은 본래 아무나 하는 분들이 아닙니다. ‘프살미스타’(Psalmista), 다시 말해서 ‘시편 낭송자’라는 직책 이름을 따로 가질 정도로 준비된 분들이어야 합니다. 시편 낭송자는 ‘칸토르’(Cantor)라고 해서 전례에서 노래로 이끌어가는 분들 가운데 한 분이 맡을 수도 있는데, 그만큼 시편을 먼저 충분히 알고, 묵상하고, 제대로 표현해서 듣는 분들의 마음에 시편을 심어주었으면 합니다.
가끔은 화답송 시편이 부담스러운 자리이기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발성에 신경을 쓰느라 우리말 발음을 제대로 못 하거나, 반대로 너무 꼭꼭 씹어 발음하느라고 띄어 읽기도 없이 ‘주.님.은.나.의.목.자’를 아주 천천히 낭송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인데, 저는 개인적으로 저주 시편도 아주 좋아합니다. 몇 년 전, 아주 힘들었던 사순시기에 “Warum ist das Licht gegeben dem Mühseligen”(이 곤궁한 이에게 도대체 왜 빛을 보게 하셨나이까)라는 욥의 외침을 노래로 만든 브람스의 모테트를 부르면서 ‘저주 시편도 이렇게 지금 나의 마음을 깊이 표현할 수 있겠구나’ 느꼈기 때문입니다. 다른 시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먼저 시편을 깊이 받아들이고 그 마음을 노래로 표현한다면 어떨까 합니다. 인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럽게요. 그러면 같은 자리에서 같은 시간에 하느님의 말이자 우리의 말이 되는 시편이 다 같은 마음을 만들어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며칠 전 끝기도를 바치다가 찬미가 한 절이 갑자기 마음에 확 들어왔습니다. 보통은 로마 성무일도 찬미가를 그대로 자국어로 번역하는데, 스페인 주교회의에서는 찬미가를 아예 새로 만들었습니다. 단순한 내용인데도 얼마나 확 와닿던지요. 우리네 성가, 시편, 찬미가가 시인들의 깊고 아름다운 시가 되기를, 또 우리의 마음이 시와 하나가 되기를, 그래서 우리 모두가 시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Antes de cerrar los ojos, / los labios y el corazón, / al final de la jornada, / ¡buenas noches!, Padre Dios.”
“두 눈을 감기 전, 입술도 잠그고 마음도 닫기 전에, 이 하루 여정의 끝에 서서 하느님 아버지께 인사 올립니다. ‘안녕히 주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