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인 오메트르 신부는 조선에서 보낸 짧은 여름을 영성생활에 힘쓰며 보냈다. 1863년 조선에 입국한 오메트르 신부는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고 다블뤼 주교가 체포되자 위앵 신부와 함께 자수, 3월 30일 갈매못에서 순교한다. 3년간의 짧은 시간이지만, 오메트르 신부는 조선에서의 전교에 최선을 다했고, 기도와 영적독서를 하며 여름을 보냈다.
오메트르 신부가 1865년 10월 가르멜회 원장 수녀에게 보낸 편지에는 조선에서 여름을 보낸 이야기가 담겨있다. 오메트르 신부는 “묵상, 미사, 아침 식사, 시과경, 묵주 기도, 복사와 조선어 공부, 그리고 정오까지는 혼자만의 시간을 갖습니다”라고 전할 뿐 아니라 “점심 먹기 전후에는 영적독서를 하는가 하면 저녁기도와 끝기도, 신학공부, 성경읽기로 하루를 마무리 한다”고 덧붙인다.
신자들과 만나는 일도 중요한 일과 중 하나라고 전한다.
“12, 16, 20㎞ 떨어진 곳으로 병자성사를 주러 갈 때도 있고 주일이나 축일에는 미사를 봉헌하고 고해를 들어야 합니다. 동료가 저를 보러 오기도 하고 제가 동료를 보러 갈 때도 있습니다. … 아주 드물고 아주 힘들게 만나는 만큼 이런 방문은 더더욱 즐겁습니다. 이런 기회를 이용해서 영혼과 정신과 육체를 회복시키려고 애쓰는 것이지요.”
이처럼 오메트르 신부는 여름 동안에도 교우촌 순회방문을 쉬지 않았고 잠시의 휴식기 동안 동료 선교사들과 만나며 활력을 찾기도 했다.
서양 선교사들, 어디서 쉬었나?
수원시와 용인시에 걸쳐 있는 광교산 기슭,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동천로437번길 67에 자리한 손골성지는 서양선교사들이 더위를 피해 휴식을 취했던 곳 중 하나다.
서울과 가까우면서도 은거하기 좋은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손골은 1857년부터 1866년까지 5명의 선교사가 다녀갔다. 손골 공소가 본격적으로 조선말과 풍습을 배우는 장소가 된 것은 1857년 이후이다.
1857년에 입국한 페롱 신부와 1861년 입국한 조안노 신부와 칼레 신부, 1863년에 입국한 오메트르 신부는 조선말을 배우고 사목 준비를 위해 손골로 보내졌다. 1865년에 입국한 도리 신부도 손골에서 시간을 보냈다. 선교사들은 손골에 머물면서 신자들의 도움을 받아 적응기간을 가졌다.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도 사목방문을 쉬었던 여름철 농번기에는 손골을 찾아와 피정도 하고 지친 몸과 마음을 재충전하기도 했다.
다블뤼 주교가 손골에서 보낸 1853년 9월 18일 편지에는 손골의 아름다운 풍경이 상세히 묘사돼 있다. “마을에서 나와 몇 백 발걸음 어쩌면 천 걸음일지도 모를 거리를 가면 예쁘고 아담한 장소가 있어요. 그곳엔 꽤 높은 바위 두 개가 있는데, 두 바위 사이로 물이 흐르고 바위 주변은 관목들로 완전히 뒤덮여 있으며 거기엔 아무도 모를 사각의 공간이 숨겨져 있어요. 거기엔 마침 작은 폭포도 있는데요. 높이가 대략 두 자밖에 안 되지만 더할 나위 없이 매력이 있답니다.”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미산리 141에 자리한 미리내성지도 선교사 오메트르 신부가 여름을 보냈던 곳이다. 1865년 10월 미리내에서 편지를 부친 오메트르 신부는 “여기 산이 풀과 꽃으로 뒤덮이면 얼마나 아름다운지, 때때로 저 멀리 보이는 지평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도 말씀드릴 수 있지요”라고 가르멜회 원장 수녀에게 전하고 있다. 특히 여름 동안 이곳에서 피정도 하고, 언어와 신학 공부도 하며 작은 안식을 찾았음을 편지를 통해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