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느님을 만나는 산
오르막을 오르고 올라 성지 입구에 다다랐지만, 사실 산을 오르는 순례길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예로부터 신앙선조들은 하느님을 만나고자 산을 올랐다. 모세는 시나이산에서, 엘리야는 카르멜산에서 하느님을 찾았다. 예수님도 산 위에서 참행복을 가르치셨고, 수난 직전 올리브산에 올라 기도하셨다. 우리나라 신앙선조들도 산을 올라 천진암이라는 암자에서 강학회를 열었고, 신앙을 받아들였다.
길게 뻗은 오르막 위로 커다란 십자가가 보였다. 생각보다 가파른 언덕이었지만, 어린아이에서 어르신에 이르기까지 많은 순례자들이 십자가를 향해 걷고 있었다.
고요한 산속에 나뭇가지가 바람에 나부끼는 소리,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도시의 온갖 소음에서 벗어나니 이 자체로도 피정(避靜·retreat)을 하는 기분이다. 피정은 피속추정(避俗追靜) 또는 피세정념(避世靜念)을 줄인 말로, 세속을 피해 고요함을 따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일상을 떠나 기도와 묵상을 통해 하느님을 찾는 일이 바로 피정이다.
피정의 기원은 다름 아닌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공생활을 시작하기에 앞서 40일 동안 단식하고 기도했다. 예수님의 이 ‘피정’은 초기 수도자들의 모델이 됐다. 그리고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이 「영신수련」을 저술해 구체적인 피정 방법을 소개하면서 피정이 교회 안에 대중적으로 퍼지게 됐다.
300m 남짓한 길에 쉼 없이 오르막이 이어지니 생각처럼 쉬운 길은 아니다. 이 언덕을 오르는 지혜로운 방법은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는 것이다. 언덕길을 향해 조성된 십자가의 길을 한 처, 한 처 바치며 오르다 보면 어느새 커다란 십자가 앞에 다다르게 된다.
실제로 많은 순례자들이 이 십자가의 길을 바치며 언덕길을 오르고 있었다. ‘십자가의 길’이 예루살렘의 성지를 순례하고자 하는 바람에서 비롯된 신심행위라는 점을 생각하면 순례에도, 또 사순을 묵상하는데도 더 없이 좋은 기도다. 물론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지 않아도 십자가를 바라보며 길을 오르는 자체로도 기도가 된다. 가빠지는 숨에 말수가 적어지고, 생각이 단순해져 ‘세속을 떠나 고요해지는’ 피정이 된다는 것은 덤이다.
넓은 터에 자리한 야외제대를 지나 이곳에 묻힌 초기 신앙선조들의 묘역을 향해 다시 산길을 올랐다. 다시 500m 가까이 산길을 올라야 하니, 신앙을 배우고자 매번 강학회를 찾던 신앙선조들이 새삼 더 존경스러워졌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신앙선조들이 걸었던 험한 산길에 비하면 이 길은 완만하고 편한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