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한 해 나에게 의미 있었던 일을 한 가지 선택하라면 매달 신문에 몇 문장 글을 남긴 것이다. 가볍게 읽어왔던 책에서 몇 가지 건져 올린 지식거리로 지면을 채워 갔던 시간들이다. 치열한 탐구 보단 즐기듯 주워 담은 지식의 파편들을 펼쳐왔기에 딜레탕티슴(이것저것 취미로 즐기는 태도)이라 할 수 있겠다. 이렇게 퍼질러진 얕은 지식거리는 때론 인간관계에서 겸양을 놓쳐 자만의 빌미가 되기도 한다. 학문이나 예체능을 깊고 단단함 보단 얕고 허술하게 대해왔던 태도가 사목을 비롯한 내 삶의 전반적인 자세는 아닌지 경계한다.
몇 가지 지식거리에 의존하는 나의 일면은 마치 헤르만 헤세의 소설 「싯다르타」에 등장하는 한 인물을 떠올리게 한다. 주인공 ‘싯다르타’의 절친 ‘고빈다’라는 인물이다. 이들은 깨달음을 위해 함께 출가한다. 그리고 기원정사를 찾아가 부처를 만나기에 이른다. 하지만 곁에서 가르침을 듣길 원한 고빈다와는 달리 싯다르타는 이들을 남겨둔 채 세상으로 나간다. 그리고 일상을 마주하며 사랑, 방탕, 방황, 깨달음을 거듭하다 훗날 고빈다와 다시 마주한다. 그리고 아직 부처의 가르침에 매여 있는 고빈다에게 자신이 깨달은 바를 전한다.
“지식은 전달할 수 있지만, 지혜는 전달할 수가 없는 법이야. 우리는 지혜를 찾아낼 수 있으며, 지혜를 체험할 수 있으며, … 그러나 지혜를 말하고 가르칠 수는 없네.”
나의 부족한 이해로 축약해 보자니 가르침이라는 틀 안에서 얻는 지식의 한계와 규정될 수 없는 삶에서 터득하는 지혜를 말하는 듯하다.
다소 부족한 이해를 삶에 대한 누군가의 고찰을 통해 채워보려 한다.
“글은 삶을 온전히 감당하지 못한다.”
김훈 작가의 단편소설 「저만치 혼자서」 말미에 적힌 글귀이다. 작가의 글귀를 되새기며 그의 시선에 비친 성직의 삶을 훔치듯 읽어본다. 작은 어촌마을, 수도자들이 삶의 끝자락을 보내는 도라지 수녀원, 고해성사, 장례미사를 중심으로 이야기는 펼쳐진다. 누군가가 살아온 그리고 살고 있는 일상을 전한다. 이 단편소설의 등장인물인 장분도 신부는 “무너져가는 자신의 육신을 이끌고 타인의 죽음을 보살폈던” 실존 인물인 ‘故 양치릴로 신부’의 삶을 모티브로 했다. 배낭을 지고 버스와 전철을 갈아타면서 은퇴 수녀들이 모여 사는 수녀원을 다니며 미사를 드렸다는 그는 본인도 깊은 병을 안고 있음에도 임종을 맞은 수녀들의 죽음을 배웅했다. 그렇게 마흔이라는 나이에 이 세상을 다녀간 사제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직무에 충실했다고 전해진다.
얼핏 작가의 뛰어난 필력은 누군가의 삶을 온전히 감당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담담하게 살아간 삶을 지우고 보니 글은 공허해진다. 슴슴한 글이 삶에 기대어 활력을 얻는다. 그저 무심히 반복되는 나의 일상도 이를 통해 비범하게 살필 여지를 얻고 나니 지혜는 덤인 듯하다. 이쯤 되니 어쭙잖은 나의 글쓰기 과정도 내 삶의 일부임을 자각하게 된다.
문득 복음에 비친 아기 예수님을 떠올려본다. 글로 박제된 가르침보다 태어남이라는 삶의 일부에 주목한다. 진복팔단의 글귀보다 포대기에 싸여 누운 구유를 바라본다. 가난, 슬픔, 온유, 정의, 자비, 순수, 평화가 그 안에 온전히 담긴 듯하다. 그렇게 오시고 머물고 가신 삶은 가벼이 스쳐감이 아닌 투신(投身)이었음을, 그러하기에 가르침이 빛난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는다. 매년 다가오는 성탄은 새 생명의 아기처럼 새롭게 시작해 보자는 삶의 의지를 이끄는 듯하다. 그렇게 나의 삶도 한 해의 성찰과 함께 조금이나마 새롭게 이어가길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