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 시기입니다. 이맘때면 황동규 시인의 ‘즐거운 편지’라는 시가 생각납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연인 간의 기다림도 이러할진대 주님을 기다린다는 우리의 자세는 어떠할까. 과연 말씀에 따라 묵상하며 고민하고 실천하는 기다림을 하고는 있을까. 개인적으로는 그동안 가톨릭신문에 글을 쓰면서 ‘민족, 화해, 일치’ 각각의 의미에 대해 많은 묵상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셈법과 인간의 셈법이 다르고 하느님의 시선과 인간의 시선이 다르며 하느님의 질서와 인간의 질서가 다르기에 하느님 뜻에 부합하게 산다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일지 자주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묵상과 더불어 실천의 중요성도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게 했던 것 중의 하나였습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는 말씀은 저에게 실천의 중요성을 떠오르게 했던 구절입니다.
결국 말씀을 묵상하고 그 뜻에 맞게 실천하는 것이 신앙인들의 기다리는 자세가 될 것입니다. 이런 자세를 놓쳐 버린 채 남들도 다 하니 나도 해 보겠다는 의미로 액세서리처럼 신앙생활을 하거나 사람들과의 네트워킹 수단으로 교회에 나오는 것은 올바른 기다림의 자세가 아닐 것입니다. 이는 결국 주님과 함께하지 않는 자요, 주님이 바라시는 바를 흩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나와 함께하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버리는 자다”(마태 12,30)라고 일갈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언제나 제게 죽비와도 같습니다. 생각해 보니 이번 대림 시기는 조금 더 특별한 것 같습니다. 6개월간 저에게 교리를 배웠던 예비신자들이 12월 24일 세례를 받기 때문이죠. 그동안 예비신자들께 하느님 백성이 된다는 것,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제대로 전달됐을까 걱정도 됩니다. 그럼에도 올해 대림 시기는 저나 예비신자들이나 ‘기다림의 자세’를 가다듬는 중요한 시기인 것 같습니다.
※그동안 ‘민족·화해·일치’를 집필해주신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 박천조(그레고리오) 연구위원님과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 총무 강주석(베드로) 신부님, 뉴몰든 한글학교 이향규(테오도라) 교장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