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황금기는 유학 시절… 좋은 작품 많이 보고 꾸준히 작업했죠”
어려운 형편에도 용기내 진학
서양화과 불합격·조소과에 ‘덜컥’
1976년 이탈리아로 유학 떠나
화가를 꿈꾸던 조각가
중학교 다닐 때 그림을 좀 잘 그렸어요. 그래서 특별활동으로 미술부에 들었어요. 당시는 물감도 종이도 귀해서 그림을 많이 그리지 못했어요. 다행히도 당시 교장 선생님께서 물감과 종이를 사 주시면서 지원을 해 주셨어요. 그때 홍익대에서 하는 전국 공모전에 출품했는데 제가 특선을 했어요. 그러면서 그림을 더 공부해보자라는 생각을 했어요.
사실 집안 상황이 미술대학에 갈 형편이 안 됐어요.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어머니께서 생계를 꾸리셨어요. 게다가 학원이나 과외를 받아 본 적도 없고, 미술반에서 그림을 그리는 정도였죠.
그래도 용기를 내서 서울대 미술대학에 지원했어요. 그런데 1지망으로 서양화과에 지원했는데 떨어지고, 2지망으로 조소과에 붙어버렸어요. 학교를 다니면서도 재수를 해서 다른 데에 갈까도 생각했어요.
당시 서울대 미술대학 학장이 장발(루도비코) 교수였는데, 일본과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오셔서 저희에게 굉장히 신경을 많이 써주셨어요. 당시는 미대에 갔다고 하면 돈 버는 것하고는 거리가 먼 시대였는데, 그런 삶을 택한 우리를 굉장히 높게 평가해주셨어요. 그런 것들이 공부를 계속할 수 있는 동기가 됐어요. 또 할 게 그것밖에 없기도 했어요. 집이 넉넉했거나 재주가 많았거나 했으면 다른 것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선택지가 따로 없었어요.
조각에 눈뜬 이탈리아 유학
1963년 대학을 졸업하고 미술이론, 특별활동 강사로 일을 했어요. 그러다가 1976년 이탈리아로 유학을 하게 됐어요. 원래는 프랑스로 가려고 했는데, 나이가 많았죠. 로마미술아카데미아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작업에만 몰두할 수 있게 됐어요.
당시 저를 지도해준 에밀리오 그레코 교수는 드로잉을 강조했어요. 대상에서 느껴지는 인체의 본질을 파악하라는 거였죠. 나는 드로잉 실력이 형편 없어서 거의 3년 동안 많이 힘들었어요. 보통 여러 종류의 펜으로 드로잉을 했는데, 4학년 때부터 내 성격대로 파스텔 연필로 부드럽게 표현했어요.
그레코 교수는 제 작품에는 관심을 주지 않았어요. ‘딱딱하고, 자유가 없다’고요. 계속 고민하고 반성하는 시간을 가졌어요. 그리고 깨달은 것이 내가 경직된 한국사회의 구성원이었다는 것이었어요. 한국의 역사와 사회 분위기와 더불어 가정환경과 미술교사를 하며 몸에 익힌 모범생의 삶이 작품 표현에 나타난 것이었죠.
결국 답은 내게 있었어요. 많은 작품들을 보고 느끼고 이탈리아 학생들과 어울리면서 그들의 문화에 조금씩 적응해 갔고, 제게도 변화가 생겼죠. 그러다가 3학년 때쯤 친구의 두상을 만들고 있었는데, 교수와 친구들이 “아름답다”고 평가를 해 준 게 기억나요.
제 인생의 황금기는 이탈리아에서 작업할 때예요. “딱딱하고, 자유가 없다”고 한 그레코 교수의 지적과 미술관에서 좋은 작품을 볼 수 있었던 기회, 주물공장과 돌 공방에서 좋은 작품이 탄생하는 비밀을 터득한 거죠.
성미술의 토착화를 향해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 가회동성당에서 세례를 받았어요. 어머니께서 신자셨어요. 대학 다닐 때 학교에 천주교 신자들이 많았지만 그들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학교 다닐 때는 세례를 받지 않았어요.
혼자 스스로 성당에 가 교리 공부를 시작했는데, 몇 번 안 하고 세례를 받았죠. 당시 주임 신부님이 재밌는 분이셨어요. 영세 전 찰고를 하는데, “주일에 옆집에 불이 났다. 불을 끄러 갈 것이냐, 성당에 갈 것이냐?”고 묻더라고요. 전 “불을 끄러 갈 것”이라고 답했는데, 바로 통과시켜주더라고요.
1980년 중반 가톨릭미술가회에 가입하면서 성미술 작품을 시작했어요. 십자고상, 성모상, 십자가의길 14처, 서소문 성지 순교자 현양탑, 감실, 성인상, 예수성심상 등 부탁을 받으면 어쩔 수 없이 하는 수준이었어요. 성미술 작품을 할 때도 그냥 평소 하던 대로 작업했고요.
다만 한국적인 면을 중시하려고 했어요. 처음 성모상 제작을 의뢰받았을 때 ‘어떻게 표현할까’를 생각하다가 먼저 그 시대의 아름다운 여인을 표현하려 했고, 얼굴은 한국인의 얼굴이었어요. 당시 조카를 모델로 만들었죠.
저는 경주 남산을 좋아해요. 남산 자체가 작품이잖아요. 자연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인도 불상과는 다른 우리나라의 멋을 낸 불상들이 있어요. 우리 가톨릭 조각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성미술 작가들에 대한 배려도 더 필요한 것 같아요. 급하게 미술품 제작을 요구하는 경향이 있어요. 충분한 시간을 주고 또 작품 제작비도 충분히 배려해야 해요.
이제 나이 들어서 예전처럼 활발하게 작업을 하진 못해요. 허리를 다쳐서 한 2년 동안 작업을 못했고요. 그래도 흙 작업은 계속하지만, 이제 집중력도 떨어지고 있어요. 게으름 피우는 젊은 작가들 보면 안쓰러워요.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한창 젊었을 때 열심히 작업하면 좋겠어요.
■ 임송자(리타) 작가는…
1940년 서울 출생. 1963년 서울대 미술대학을 졸업했다. 1976년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나 1980년까지 로마미술아카데미아와 로마시립장식미술학교, 이탈리아 조폐국 메달학교를 졸업했다. 1980년 로마 산 자코모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연 이래 3차례의 개인전과 회고전을 통해 ‘현대인’과 ‘봄이 오는 소리’, ‘손’을 주제로 연작품을 선보였다.
1999년 가톨릭미술상 본상, 2000년 김세중 조각상, 2004년 이중섭 미술상, 2006년 국무총리 표창을 받았다. 또 1982~2006년 중앙대 조소과 교수로 후학 양성에도 힘을 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