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

상보/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유엔의 승인' 국제학술회의

곽승한 기자
입력일 2008-12-21 09:57:00 수정일 2008-12-21 09: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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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권 국가 승인에 교황청 큰 역할

1948년 12월 12일 프랑스 파리 샤이요 궁에서 열린 제3차 유엔총회는 찬성 41표, 반대 6표, 기권 1표라는 압도적인 지지로 대한민국정부만이 ‘한반도에 존재하는 유일한 합법정부’(유엔 총회결의 195 Ⅲ호)임을 결의했다.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로서 대한민국의 법통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이 자리에는 장면(요한 ·1899~1966) 수석대표를 단장으로 조병옥(1894~1960), 정일형(1904~1982), 김활란(1899~1970) 등 7명으로 구성된 대표단이 파견됐다.

그로부터 정확히 60년 후. 2008년 12월 12일 서강대학교에서 그 승인의 배경과 의미를 회고하는 국제학술회의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유엔의 승인’이 열렸다.

이날 학술회의에서는 1948년 유엔이 대한민국 정부를 승인하는데 바티칸의 역할이 컸으며, 여기에는 장면 유엔 파견 수석대표가 중개 역할을 했다는 주장이 새롭게 제기됐다.

당시 장면 수석대표는 제3차 유엔총회에서 유엔 58개 회원국 대표들에게 대한민국 정부 승인의 당위성을 설득했으며, 교황청의 한국 특사 파견과 라틴아메리카 가톨릭 국가들의 지지를 성사시켜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허동현 교수(경희대학교)는 ‘대한민국 승인을 위한 수석대표 장면의 활동’이라는 발표문을 통해 장면 수석대표가 대한민국의 건국과 유엔의 승인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한 역할을 집중 조명했다.

허 교수는 “국제 외교무대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교황 비오 12세는 1947년 장면 대표와 깊은 관계를 맺은 미국의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번 주교를 특사로 한국에 파견했다”며 “이는 국제 관례상 교황청이 한국을 주권국가로 승인한 것으로 이해돼 한국 정부가 국제적 승인을 받는 데 큰 힘이 됐다”고 전했다.

그는 또 “대한민국 정부가 유엔의 국제적 승인을 얻는데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용한 것이 바티칸 교황청의 역할이었다”며 “이 과정에서 유학 등을 통해 미 정부 및 가톨릭계 인사들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었던 장면 대표의 힘이 컸다”고 강조했다.

이에 앞서 어윈 조세프 엔더 대주교(교황청 국무부)는 ‘대한민국 승인에 미친 바티칸의 역할’이란 발표문에서 “가톨릭교회 인사들과 선린 관계를 유지했던 장면 박사는 프랑스 주재 교황청 대표 론칼리 대주교와 바티칸 국무장관 몬트니 대주교를 만나 유엔의 승인을 이끌어내는 데 일정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그의 발표문은 1940년대 바티칸의 외교문서 기록을 토대로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 당시 바티칸이 맡은 외교적 역할을 연구한 것이다.

이밖에도 박흥순 교수(선문대학교)는 ‘건국과 유엔의 역할’이라는 발표에서 “제3차 유엔총회는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적 정부로 승인해 한국의 건국을 국제적으로 공식화했다”며 한국이 주권국가로서의 기반을 마련하고 발전하는데 있어 유엔의 역할을 강조했다.

■ 교황청 국무부 어윈 조세프 엔더 대주교 발제문 요약

우리는 오늘 대한민국 유엔 승인 6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보편교회를 위해 일하며 교황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교황청 국무부의 역사는 15세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저는 발표에 앞서 대한민국이 1948년 제3차 유엔총회를 통해 유엔의 승인을 받은 것을 기념하며, 대한민국의 최고 이상을 위해 헌신하신 많은 분들에게 진실한 경의와 존경을 표합니다.

대한민국을 위해 헌신한 수많은 공로자 가운데, 정치가이자 외교관이었던 세례자 요한 장면 박사는 대한민국을 위해 아주 중요한 일을 수행했습니다. 그는 수석대표로 활동하며 외국 정부의 고위 관료 및 외교관들과의 만남에서 자신의 맡은 바 책임을 완수했고, 이와 함께 가톨릭 신자로서 교회 성직자 계층과의 유대 관계도 가져왔습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대한민국이 유엔승인을 받은 제3차 유엔총회 며칠 후, 장면 박사가 교황 비오 12세를 알현한 것을 증언하고자 합니다. 이는 당시 한국 정부 뿐 아니라 한국 교회에도 매우 중요한 순간으로 기억됩니다. 장면 박사는 이 때 교황청과 교황 비오 12세가 보여준 관심과 격려에 감사하며, 깊은 존경을 표현했습니다.

잊지 말아야 할 부분이 또 하나 있습니다. 당시 어려운 여건 속에서 장면 박사의 소중한 지인들이었던 성직자들은 너무나 중요한 역할을 해냈습니다.

1963년 12월 11일 한국과 교황청은 마침내 수교를 맺습니다. 곧이어 서울에 한국 최초의 교황청 대사관이 세워집니다.

사진설명

▲춘천교구장 장익 주교(맨 오른쪽)를 비롯한 국제학술대회 참가자들이 손병두 총장의 개회사를 듣고 있다.

▲교황청 국무부 어윈 조세프 엔더 대주교

곽승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