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진한 그리스도의 향기를 품고 있다. 겸손하며 모든 이에게 친절하고, 모두를 섬기는 사제로도 정평이 나 있다. 오죽하면, ‘서울대교구 안에서 구요비 신부를 욕하는 신부가 있으면, 바로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늘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고, 하느님의 뜻을 살피기 위해 복음 안에서 살아가는 이. 구요비(욥) 주교의 삶과 신앙을 돌아본다.
■ 아버지가 뿌린 신앙의 길
구요비 주교는 6·25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위곡리에서 4남1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독실한 신앙을 가졌던 부친 고(故) 구동식(안토니오) 옹은 자녀의 이름을 모두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에서 따왔다. 맏이인 딸은 ‘평화의 사도’를 줄여 화사(클라라)로, 둘째이자 맏아들은 요한(요한), 셋째 아들은 요섭(요셉), 구 주교는 요비(욥), 이어 막내아들은 요나(요나)로 이름 지었다.
구 주교가 어린 시절, 그의 집은 지역 공소 역할을 했다. 당시 서울대목구 청평본당 주임이었던 윤을수 신부는 구 주교의 집을 공소로 삼아 밀가루 등 미국교회에서 보내온 원조물품을 나눠줬다.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 가톨릭교회의 나눔이 이뤄진 그 현장에서의 체험은 구 주교 신앙의 밑바탕이 됐다. 또한 구 주교의 집을 근간으로 춘천교구 미원본당이 설립됐다.
구 주교의 부친은 자녀들을 모두 사제와 수도자로 키우고 싶어 했다. 구동식 옹은 구 주교 위의 두 형들을 신학교까지 끌고 갔다 오기도 했다. 결국 구 주교가 아버지의 바람대로 사제의 길을 걷게 됐다.
구 주교의 동생 구요나(요나·62·수원교구 하남 성 정하상바오로본당)씨는 “형제들이 모두 유아세례를 받고 성당에 다니긴 했지만, 구 주교님이 제일 열심이었다”면서 “고등학교 시절부터는 서울 삼양동본당에 다녔는데, 그곳에서 학생회 활동을 열심히 했고 거의 매일 성체조배를 했다”고 전했다.
■ 조용했던 신학생, 노동사목에 눈 뜨다
구 주교는 고등학교 2학년이던 1969년부터 사제성소를 꿈꾸게 됐다. 평소 철학에 관심이 많았던 구 주교는 정신적이고 영성적인 완덕의 삶을 살고자 신학교에 지원했다. 조용하고 조심스러운 성격으로 신학교에서도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구 주교의 사제서품 동기 박일 신부(서울 동성고등학교 교장)는 구 주교를, 조용했지만 ‘반전’이 있던 선배로 기억하고 있다.
박 신부는 “당시 1학년이던 나에게 누군가 밝게 ‘도미네~ 식사했수?’라고 인사를 건네 뒤를 돌아보니, 구 주교님이 쑥스럽게 미소를 띠고 있었다”면서 “평소 조용하고 조심스러운 성격이셨지만 4살이나 어린 나에게 관심을 보이며 친근하게 인사를 건네는 모습에서 따뜻함을 느꼈다”고 회상했다.
그렇게 조용한 신학생이었던 구 주교에게는 또 다른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구 주교가 1학년이었던 1971년 모든 신학생을 대상으로 진행된 노동사목 연수에서 구 주교는 노동문제에 눈뜨게 됐다. 이후 구 주교는 노동자들의 생활을 알기 위해 ‘위장취업’을 해, 노동을 체험했다. 또 ‘밀알회’(현재 가톨릭대 신학대학 사회사목연구회)라는 동호회 활동을 하면서 노동자들과 어떻게 함께할 수 있는지 동료 신학생들과 연구했다. 사제수품 이후로는 가톨릭노동장년회(CWM)와 가톨릭노동청년회(JOC, 현 YCW) 지도신부,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 위원을 맡으며 꾸준히 노동자들과 함께 해왔다.
■ 가난의 영성, 프라도 사제회
노동자에 대한 관심은 구 주교를 프라도 사제회로 이끌었다. 당시 노동사목에 종사했던 살레시오회 도요안 신부를 통해 ‘프라도 사제회’의 존재를 알게 됐다. 구 주교는 1981년 사제 서품과 동시에 ‘프라도 사제회’ 서약을 하고, 평생 스스로 가난한 삶을 실천해왔다.
구 주교는 1986년부터 1998년, 2006년부터 2012년까지 두 차례 ‘프라도 사제회’ 한국지부 대표로서 활동하기도 했다. 2007년 8월에는 아시아 지역 사제로는 처음으로 ‘프라도 사제회’ 국제평의회 위원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정월기 신부(서울 광장동본당 주임·프라도 사제회)는 “구 주교님은 프라도 사제회의 맏형이었다”면서 “늘 맏형으로서 모범을 보이셨고, 후배들과도 친구처럼 우정을 나누며 사셨다”고 말했다. 이어 정 신부는 “구 주교님은 예수님을 닮은 사제”라면서 “모든 이들, 그 중에서도 특히 가난한 사람들 안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시는 모습이 아름답다”고 말했다.
■ 영성 가득한 양 냄새 나는 목자
구 주교는 프랑스 파리 가톨릭대학교에서 수학하며(1998~2000) 영성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2002년부터 7년간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에서 영성 지도 신부를 지냈다. 구 주교가 지도 신부로 있을 당시 신학생들은 구 주교를 많이 따랐다.
본당에서도 찾아가는 사목자, 기도하는 겸손한 사목자로 기억되고 있다. 2013년부터 서울 포이동본당 주임을 맡은 구 주교는 꾸준히 본당신자 가정을 찾아가 신자들의 삶을 돌봤다.
특히 구 주교는 어린이들을 좋아한다. 포이동본당 니콜라오 어린이집에 자주 들러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하며, 매달 아이들과 함께 미사를 드리기도 한다. 미사에 참례한 아이들과도 서슴없이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한영수 신부(한국 프라도 사제회 책임자)는 “구 주교님은 꼭 필요한 물건 외에는 다 나누어 주시는 등 누가 봐도 단순하고 소박한 모습을 보이셨다”면서 “진정 가난의 영성을 사신 분”이라고 밝혔다.
포이동본당 김용수 부제는 “구 주교님을 떠올리면 성당에서 늘 혼자 앉아 기도 하시는 모습이 가장 기억에 난다”면서, “오로지 주님만을 바라보시고 주님께 기도하는 모습에서 진정한 사제의 삶에 대해 돌아보게 됐다”고 말했다.
깊은 영성으로 언제나 신자들과의 신앙상담을 마다하지 않으며, 항상 가난한 이웃을 보듬어왔던 구요비 주교. 프란치스코 교황이 항상 강조해왔던 ‘양의 냄새가 나는 목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