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남의 딱한 처지를 도와준 일이 있는지 지금 자신이 서질 않는다. 그러나 남을 도와주고 있다고 자부하는 이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다.
우리는 신문지상이나 기타 매스콤을 통하여 같은 땅과 하늘에 있으면서도 생활의 추위에 떨고있는 헐벗은 이들을 도우는 훌륭하고도 흐뭇한 얘기를 종종 듣는다. 그러나 그러한 기사를 읽을 때마다 한가지 생각나는 것은 기사의 육하원칙이라는 것이 기사의 충실함을 인식케하는 것이라지만 힘을 합하여 도우고자 모이는 그들의 집합장소쯤은 밝히지 않았으면 좋을까 한다『자선을 위한 х х 호텔에서의 칵테일 파티』라는 등 그 따위 말은 자선을 위해 파티에 참가하고 또 남을 돕겠다는 그들의 아름다운 마음을 비난의 대상으로 몰아가는 것밖에 안된다. 어떠한 면으로 생각해 볼 때 자선을 위한 파티가 아니라 파티를 위한 자선이 되는 경우를 우리는 흔히 목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경우가 그러하다는 것은 아니다.
꼬집어 얘기하라면 정부고관의 부녀들 모임이라든가 사회 고위층 인사들의 모임같은 것을 들수있다. 여하튼 문제는 매스콤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잘못이기도 하지만 보다 큰 잘못은 그 기사의 육하원칙이라는 속에 누가 누구를 도왔다는 정도가 아니라 어떠한 방법으로 어떠한 장소에 어떻게 모여서라는 것까지 너무나 상세하게 보도하여야 한다는 법칙 때문이다. 그러한 점에서는 육하원칙이 큰 잘못이다.
또 그보다 더 큰 잘못은 기사를 읽는 독자들에게 있다.
얼마전에 직장에서 있은 일인데 신문을 보던 미스터 김이『망할것들, 하루밤에 쓰는 그 비용이면 자선금의 몇배는 될…』라는 흥분된 어조에 들여다 보았더니「수재민 자선이 밤」이라는 제하의 기사였었다.
그러나 그렇게 독자들이 흥분하는 것은 독자들의 어리석음이다. 흥분할 만한 곳은 싹 빼놓고 읽어가면 될 일이지 구태여 남을 돕는다고 힘쓰는 이들을 탓할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이 말이다.
그런데 어떤 독자는 이렇게『남을 도운다는 것은 선을 행하는 것이며 선은 선을 해하는 그 자체가 보답이 아니겠느냐? 우리는 가끔 개선장군의 위용마냥 내가 누구를 도왔다는 것을 자랑삼아 드러내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것은 조금도 나쁜일이 못된다. 떳떳이 자랑할 수 있는 일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 자랑이라는 것은 생각해봐야 한다. 막연히 내가 먹고 남는것이 있으니 너나 먹어라 하는 식의 마음에서 도왔다면 그것은 무가치한것일 것이다. 아침밥상에서 남은 것은 개에게나 주는 것이지 인간에게는 그럴수 없다. 그것은 인격의 모독이 될수 있는 것이다. 도운다는 것은 그것의 필요를 느끼는 인간과 자기를 일치시키는 상태에서만이 순수해질 수 있고 의미가 있는 것이며 선을 행하였다고 자부할 수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도움을 받은 이의 기쁨을 내가 즐거워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진정한 도움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면 오늘의 자선회나 자선의 밤이 그 비싼호텔에 모여 외식요리를 구경해야만 되는가를 생각해보라』는 열변을 토하는데 이제는 그 융통머리없는 기사를 쓰는 기자꾼들이나 말 못하는 육하원칙이나 고지식하게 읽어가는 독자들에게 이해하고 선처해달라고 부탁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래서 딱한 남의 처사를 돕는다고 자부하는 이들은 여기에 이 융통머리 없고 고지식한 인간들을 먼저 도와주는 셈치고 한번 힘을 합하여 번지없는 판자집에 모였다고 누가 머라 하랴! 수고스러운 대로 대화를 나누어 주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그리고 우리 종교행사가 가끔 호텔같은 곳에서 주최되는 것을 보는데 설혹 한국 가톨릭이 그러한 비싼비용의 장소를 택할 수 있는 형편이 된다고 하드라도 우리 이웃이 도움을 기다리고 있는 지금 현실을 축제니 머니하여 만민구제의 사명을 지닌 우리가 잠깐이라도 외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