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부교구 주교좌성당 한편에는 작은 갤러리가 있다. 이름은 ‘갤러리 평화’. 건물 외벽에는 ‘평화’를 뜻하는 단어들이 여러 나라말로 적혀 있다. 가장 크게 보이는 건 성경의 언어인 히브리어(שְׁלָם)와 그리스어(εἰρήνη)다. 이 밖에도 라틴어와 영어, 중국어로 평화를 뜻하는 글자들이 십자가 형상을 이루고 있다. 벽면 자체가 십자가 희생을 통해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평화가 이 땅에 가득하길 기원하는 작품인 것이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건넨 일성은 바로 평화였다. 끌려가는 당신을 내팽개치고 도망간 제자들에게 싸늘한 시선과 원망의 말을 건네도 인간적으로는 전혀 이상할 것이 없건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평화가 함께 하기를 기원하신다.
반면 제자들은 좌불안석이다. 복음사가들은 제자들이 유령인 줄 알고 두려워했다고 전한다. 스승을 버리고 와서 죄송스럽긴 하지만 스승은 이미 돌아가셨고, 목숨 잘 보전하는 게 능사라고 생각해 문도 꼭꼭 걸어 잠그고 숨어 있었는데, 그런 제자들 앞에 죽은 줄 알았던 스승이 나타나다니. 꾹꾹 눌러 왔던 죄책감이 온 존재를 뒤흔들었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터져나갈 것 같은데, 스승은 온화한 표정으로 인사를 건넨 것이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 이야기에서 드러나는 스승과 제자 사이의 묘한 긴장감은 신앙을 살아가는 우리에게서도 종종 발견된다. 이는 성과 속, 영과 육의 대립으로 느껴지는 긴장감이다. 우리 안에 신앙이 완전히 자리 잡지 못했을 때, 그러니까 신앙이 성숙하지 못했을 때 일어난다.
먼저 머리로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마음속엔 복음의 가치와 기준보다는 세상의 가치와 기준이 더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경우를 들 수 있다. 이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가치 있는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지만, 마음속에는 그 가르침을 따라 살다 시쳇말로 ‘호구 잡히진 않을까’ 하는 염려가 떠나질 않는다. 그리하여 그 안에 뿌려진 신앙의 씨는 싹을 틔우지 못하고 말라버리기 일쑤이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선택하기보다는 침묵하는 것을 선택하게 된다.
이와 반대로 마음으로는 그리스도를 사랑하고는 있지만 머릿속 계산이 마음을 압도해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있다. 마음속에 품고 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은 그저 감정에 지나지 않거나 더 심하게는 “나도 예수님 사랑해”라고 하는 일종의 립서비스에 그칠 뿐이다. 그리하여 그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따르지 않는 것이다.
마지막은 머리로도 마음으로도 그리스도의 자리에 다른 것을 두고 있는 경우이다. 무엇이 그리스도의 자리를 차지하는지는 시대마다 다르지만, 주로 권력과 명예, 물질적 부였다. 하지만 요즘 사회에선 물질적 부가 모든 것을 압도하는 듯하다. 돈만 있으면 저절로 권력이 생기고 명예도 생긴다고들 이야기한다. 상황이 이러하니 그 안에는 그 어떤 신앙의 씨앗도 그 어떤 그리스도의 가르침도 자리할 공간이 없다.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필요한 것뿐이다.
당대의 주류 세력에게 배척을 받아 비참한 죽음을 당할 것을 알면서도 예수님은 아버지의 가르침과 뜻이 아닌 것은 단호하게 반박하며 이 땅에 하늘나라를 보여주기 위해 인고의 시간을 보내셨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선포하신 평화는 더 큰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폭력의 부재로서의 평화가 아니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어떤 평화를 선포하고 있는지 살펴봐야 할 일이다.
글 _ 이종원 바오로 신부(의정부교구 동두천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