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인터뷰] 주 네덜란드 교황대사 끝으로 퇴임한 장인남 대주교

민경화
입력일 2025-03-31 13:34:32 수정일 2025-03-31 17:52:58 발행일 2025-04-06 제 3436호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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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동안 길이 열린다면 북한에서 선교하고 싶어”

“사랑합니다!”
1976년 청주교구에서 사제품을 받고 교현동본당 보좌를 끝으로 줄곧 청주교구를 떠나 있었던 장인남(바오로) 대주교는 지난 3월 20일 청주 내덕동주교좌성당에서 열린 퇴임감사미사에서 교구민들과 사제들에게 큰절을 올렸다. 1985년 엘살바도르 서기관을 시작으로 교황청 외교관으로서 교황청과 주재국을 잇는 가교의 역할을 했던 장 대주교는 2월 13일 네덜란드 교황대사를 끝으로 퇴임했다. 4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장 대주교는 교황청 외교관으로 지낸 시간을 “모든 것이 주님의 은총이었다”고 회고했다. 오랜 외국 생활 후 돌아와 한국 ‘촌놈’이 됐다는 일흔여섯의 사제는 한국에서 새롭게 펼쳐질 사제로서의 삶에 대한 기대감으로 눈빛이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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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8일 전 교황대사 장인남 대주교가 현재 머물고 있는 강화 꽃동네 교황 프란치스코 센터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하며 미소 짓고 있다. 박효주 기자

■ 순명하는 삶

청주교구 북문로본당(현 서운동본당)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한 장인남 대주교는 메리놀 외방 전교회의 외국인 신부들을 보며 사제 성소를 키웠다.

“어린 시절 북문로성당에서 복사도 하고 친구들과 뛰어놀면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메리놀 외방 전교회 신부님들을 보면서 신자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신앙생활을 이끌어 주는 사목자를 꿈꿨죠.”

장 대주교는 1976년 사제품을 받고 신자들 곁에서 사목하는 사제를 꿈꿨으나 1982년 유학길에 올랐다. 교황청 외교관학교에서 교회법을 공부한 뒤 1985년 주엘살바도르 교황대사관 서기관을 시작으로 40년간 교황청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그가 본당에서 사목을 한 기간은 1976년부터 교현동본당 보좌로 있었던 2년여 뿐이다.

“당시 청주교구장이셨던 정진석(니콜라오) 추기경님의 배려로 유학길에 올랐지만, 처음에는 적응하는데 어려운 점이 많았어요. 우선 말이 통하지 않아 힘들었고, 교황청 외교관 활동을 시작하고서는 주재국의 외교관들과 만나는 업무를 주로 하면서 신자들과 만나는 사목에 대한 갈증도 있었죠.”

타지 생활로 마음이 약해질 때 힘이 돼준 것은 어머니의 신앙이었다.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어머니께서는 제게 주님의 뜻을 따라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로 갈 수 있는 길을 여는 역할을 했던 요셉의 이야기를 하시면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우리가 모르는 것이니 겸손하게 순명하는 마음으로 잘 살아가라’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 말씀이 제가 어려운 시간을 이겨내는 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교황청 외교관 활동 중에 기쁨이 됐던 순간을 묻자, 장 대주교는 첫 임지였던 엘살바도르에서의 시간을 떠올렸다.

“교황청 외교관은 신자들과 만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외교관 업무가 없는 주말에 신자들과 만날 수 있도록 배려해달라고 교구에 부탁을 드렸고 외곽지대에 있는 가난한 신자촌에서 미사를 드릴 수 있었죠. 엘살바도르 신자들과 만나서 함께 기도했던 시간이 큰 기쁨으로 제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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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8일 전 교황대사 장인남 대주교(왼쪽)가 강화 꽃동네 교황 프란치스코 센터에서 함께 머물고 있는 형 장인산 신부와 사진을 찍고 있다. 박효주 기자

■ 13개 국가에서 찾은 주님의 선물

장 대주교는 1985년 엘살바도르 교황대사관 서기관을 시작으로 에티오피아, 시리아 교황대사관 서기관, 그리스와 벨기에 교황대사관 참사관을 마친 후, 2002년 대주교 임명과 동시에 방글라데시에서 교황대사로 활동했다. 이후 우간다, 태국, 캄보디아, 미얀마, 라오스, 네덜란드 등 총 13개 국가에서 교황청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방글라데시는 전체 인구 중 가톨릭신자가 0.3%에 불과하지만 신자촌을 이뤄 단단하게 신앙을 지켜나가는 모습인가 하면, 일찌감치 복음이 전파된 네덜란드는 인구의 20%가 가톨릭신자이지만 미사 참례자는 3%가 되지 않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신앙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신앙은 주님이 주신 소중한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의 선물을 받은 우리는 감사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2017년과 2019년 미얀마와 태국에 있을 당시 프란치스코 교황 사목방문을 준비했던 시간은 장 대주교에게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태국 방문은 큰 국가적 행사였습니다. 태국 왕가에서 환영식을 요청했으나 교황님은 어렵고 가난한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원하셨죠. 전 세계 사목방문 일정으로 고된 와중에도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신자들에게는 항상 웃으면서 인사를 건네셨어요. 낮은 곳에 있는 이들, 평범한 사람들 곁에 머물며 함께하시려는 교황님을 뵈며 제가 걸어가야 할 사목자의 길을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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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태국 나콘사완교구를 방문한 장인남 대주교가 현지 학생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장인남 대주교 제공

■ 일흔여섯 사제의 눈빛, 다시 빛나다

10여 개 국가를 오갈 때마다 단출하게 짐을 싸는 장 대주교가 빼놓지 않고 챙기는 두 가지 물건이 있다. 어머니가 쓰셨던 오래된 묵주와 프랑스 교황대사관 참사관 시절 인연을 맺은 로렌조 안토네티 추기경이 선물한 주교반지다.

“성 요한 23세 교황님이 끼셨던 반지를 가지고 계셨던 로렌조 추기경님은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반지인데 너에게 소중한 유산으로 맡기겠다’며 제게 주셨습니다. 묵주도 어머니가 항상 가족을 위해 기도하셨던 것이죠. 반지와 묵주를 지니고 다니면 두 분이 항상 옆에 계시는 것 같아 큰 힘을 얻었습니다. 제가 40년간 교황청 외교관이라는 중책을 잘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저를 위해 기도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던 가족과 지인, 신자분들 덕분이라는 생각을 늘 하고 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40년 만에 돌아온 한국은 많은 것이 변해있었지만 새로운 것을 배우고 꿈꿀 수 있기에 장 대주교는 앞으로 펼쳐질 사제의 삶에 대한 기대감을 내비쳤다.

“40년 만에 한국의 신자들과 만났으니 신자들과 함께 지내며 기도하는 것이 앞으로 제가 가장 하고 싶은 일입니다. 살아있는 동안 북한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린다면 북한에서 선교생활도 꿈꾸고 있습니다. 평안북도에서 태어나신 부모님의 오랜 바람을 이뤄드리고 싶기 때문이죠. 북한이탈주민을 돕고 있는 교회기관과 손을 잡고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좋겠습니다.”

교황청 외교관으로, 고향을 떠나 녹록지 않은 시간을 보냈을 장 대주교에게 남은 것은 ‘감사함’이다.

“4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와 지난 시간을 회고하며 늘 주님의 은총이 함께했기에 참 감사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제로서 주교로서 제대로 살지 못해 부족한 점이 많았지만, 지금까지 교회의 일꾼으로 살게 해주신 것에 감사할 따름이죠. 죽는 날까지 사제로 잘 살다가 주님이 부르시는 날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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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교황대사 장인남 대주교가 세계 어디를 가든 늘 지니고 다닌다는 어머니의 묵주. 박효주 기자

민경화 기자 mk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