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연령회 봉사를 이어가던 중 여느 때처럼 가게에서 일을 하던 중 갑자기 숨 쉬기가 불편해지며 의자에서 일어설 수가 없었다. 다행히 옆에 있던 직원이 119를 불렀고 난 근처 3급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갔다. 그런데 의사 선생님이 위험하다고 큰 병원으로 가라고 하는 것이었다.
영문도 모르고 안산 고대병원 응급실로 갔더니 바로 중환자실로 올려버렸다. 아내와 가족 얼굴도 못보고 중환자실에 입원한 나는 그날 저녁 여섯 번인가 일곱 번인가 숨이 멎는 아주 위험한 하루를 맞이하고 있었다.
첫 번째 숨이 멎을 때는 영문도 모르고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났는데 그 다음부터 병원에서는 운명할 것을 대비해 아내와 아들을 옆에 있게 배려를 해줬다. 아내와 아들 손을 잡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 속에 숨이 멎었다 깨어나기를 몇 번이나 계속한 끝에 죽지 않고 그 다음 날 아침을 맞게 됐다.
병명도 모르고 특별한 치료방법도 못 찾았기에 치료를 해 줄 수 있는 병원을 백방으로 찾았다. 그러던 중 아주대학교병원으로 가서 응급 중환자실에 입원을 했다.
그날 저녁 침대에서 조금 떨어진 문 쪽에서 교수님과 아내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봤는데, 갑자기 아내가 다리에 힘이 없는 사람처럼 주저앉아 버리는 것이었다. 퇴원하고 아내에게 그때 일을 물어보니 교수님이 엑스레이 사진 상으로 폐 한쪽이 다 죽어서 도저히 회복 가능성이 없으니 준비(죽음)를 하라고 해서 주저앉았다는 것이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죽는다고 하니 아내와 가족들은 얼마나 황당하고 믿기지도 않았을까... 그때부터 나만 모르는 나의 장례 준비가 시작됐다. 동생은 강원도 선산에 굴착기를 빌려 나를 묻을 땅을 파고 광중(壙中, 시체가 놓이는 무덤의 구덩이 부분)까지 지어 놓았다. 친가와 처가 가족과 친구들은 병원으로 모여 들었다.
그날 저녁 난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험하지 못한 임사 체험, 즉 죽음을 체험했다. 몸에서 내 영혼이 빠져나와 한 발을 내딛는 순간 끝도 안 보이는 낭떠러지로 떨어져 내리는 것이었다. 칠흑 같이 어두운 곳으로 말이다. 그렇게 한참을 떨어지던 중 튀어나온 나뭇가지에 왼쪽 옆구리가 걸려서 멈추고 그 순간 또 눈을 떴는데 드라마에서 보는 것처럼 의사들이 내 주위를 빼곡하게 둘러서 있고 내 입에는 풍선처럼 생긴(아마 산소를 공급하는 중이었던 것 같다) 무언가가 물려져 있었다. 아내는 한쪽 손을 잡고 울고 있었다.
하여튼 나는 다시 살아났다. 아내에게 왼쪽 옆구리가 아프다고 했는데, 아내가 옷을 올려보니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내는 아마 내가 죽기 직전에 헛소리를 하는 걸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다음 날 교수님이 아내한테 마지막으로 옆구리에 구멍을 뚫고 그곳으로 폐에 직접 약물과 산소를 공급해 보자고 말씀을 하셨다. 아내는 뭐든 해 보자고 했다. 수술 후 나는 점차 회복돼 입원한지 6개월 정도 만에 퇴원을 할 수 있었다.
글_김태은 안셀모(수원교구 연령회연합회 회장)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