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 살면서 많이 일어난 변화중 하나가 미사참례에 대한 것이다. 내가 살던 서울에서 나는 매일 새벽 미사에 참례했었다. 그런데 시골로 오니 우선 새벽 미사는 인근 50킬로 반경 내에 하나도 없고 –이 부분이 가장 이해가 안 가고 또 안타깝다- 평일 오전 미사도 아주 적거나 신부님 사정에 따라 없기가 일쑤였다. 나는 인근 성당의 미사 시간을 다 알아놓고 차로 한 시간 이상 달려가 평일 미사 참례를 하고 있다. 그래도 일주일에 세 번 이상은 참례가 힘들다.
그러던 어느 날 인근 성당에 미사가 없어 좀 먼 성당으로 평일 오전 미사를 드리러 갔다. 성당 정문에 이런 게 걸려있었다 ‘우리는 희망한다 윤석열 파면을’, 지난번에 왔을 때도 ‘우리는 국민에게 총 쏘는 대통령 필요없다’라는 플래카드를 걸어놓았던 것이 떠올랐다. 대림 기간이었던 것 같은데, 그날 강론 시간에 한 야당 정치인을 이사야 예언자 같다고 말씀하셔서 내 귀를 의심했던 기억이 났다.
사춘기 시절, 우리 본당 신부님은 정의구현사제단이셨다. 내가 고2였던 유신 말기 어느 날, 신부님은 우리들 앞에서 사복 경찰에 체포되어 가셨다. 당시 안동가톨릭농민회 수배자를 은닉해 준 혐의라고 들었다. 신부님은 미사 시간에 한 번도 그런 내색을 하지 않으셨었다. 대신 우리들 가슴에 ‘가난한 이웃’이라는 말을 새겨 주셨었다. 내 인생은 아마도 그때 반 이상 형성되었던 것이 틀림없다고 지금도 기억한다. 이 세상에 없는 것이 성당에 가면 있었다. 봉사라든가, 고통의 의미, 희생과 거룩함 혹은 생명. 가난한 이웃에 대한 숭고한 사랑 같은 거…. 그리고 또 있었다, 독재하에서 아무도 말하지 못했던 그 단어, 정의.
그때에도 고액 과외는 있었고, 그때에도 학력 우선주의는 있었으며, 부동산 투기는 노골적으로 만연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경멸할 수 있을 정도로 성당은 멋진 곳이었다. 성당에 와서 그런 이야기들을 나누면 비로소 나는 내가 인간인 것이 허무하지 않았고, 산다는 것의 의미가 죽음보다 귀하게 여겨졌다. 나는 학교를 싫어했지만, 성당은 좋았다. 내가 존재해야 할 의미를 가르쳐주는 곳이었으니까.
그리고 50년이 지났다. TV만 틀면, 핸드폰을 켜면 온 세상이 둘로 나뉘어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내용은 조금씩 다르지만 보거나 듣지 않아도 나는 그들의 말들을 10자 내외로 요약할 수 있다.
“모든 것이 쟤 탓이고 쟤를 죽여야 내가 산다.”
미사 시간에 자신의 가슴을 치면서 ‘내 탓이요’ 하는 것이 부끄러울 지경이다. 생각해 보면 내가 운동권으로 살면서 민주를 외칠 때, 나와 내 동료들은 비민주적이었다. 민주주의를 위한다고 거리로 나섰을 때, 우리 가족에게 나는 독재자였다. 내가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외칠 때, 내 가슴은 전쟁터보다 시끄러웠었다. 토마스 머튼은 히틀러를 두고 “우리 모두의 악이 그에게 가서 열매를 맺었다”라고 했다. 독재 시절의 어린 시절을 보내고 독재자 밑에서 청년 시절도 보내고 어쩌면 내 마음속에도 독재자가 산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우리 세대가 나이 들어 다 사라져야 비로소 입이 아니라 몸으로 민주주의를 살 수 있는 세대들이 오는 것이 아닐까?’하고 친구와 자조적으로 이야기하기도 한다.
돌아서 나오는 길, 성당 한쪽에 근처의 사찰에서 보낸 성탄 축하 플래카드가 그제야 눈에 띄었다. ‘우리 모두에게 평화를 주려고 아기 예수님 오셨음을 축하합니다!’
희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기를 빈다.
글 _ 공지영 마리아(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