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시대의 갈릴래아는 어디인가?
올해 주님 부활 대축일에 많은 성당들이 텅 비었었다. 우리는 다른 어떤 장소에서 빈 무덤에 관한 복음을 선포했다. 텅 빈 교회의 상태가 우리에게 빈 무덤을 상기시킨다면, 우리는 천사가 들려주는 다음 목소리를 흘려듣지 않아야 한다.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되살아나셨다. 그분께서는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것이다.”
우리가 묵상해야 할 내용은 이렇다. “오늘날 갈릴래아는 어디인가?” “우리는 어디에서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가?”
사회학적 연구 결과에 따르면, 우리의 세계에는 ‘신앙인’이 점점 줄어들고, ‘구도자’가 늘어난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무신론자’의 수도 늘어난다고 한다.
자신을 신앙인으로 여기는 사람과 비신앙인으로 여기는 사람을 분류하는 것은 이제 중요하지 않다. ‘구도자’는 신앙인 가운데도 있고, 비신앙인 가운데도 있기 때문이다. 이 비신앙인은 주변에서 제시하는 종교적 표상들을 거부하지만 진정한 목마름을 잠재울 수 있는 샘의 갈망을 느낀다.
나는 죽음을 이기신 하느님을 찾기 위해 가야하는 이 ‘현대의 갈릴래아’가 바로 구도자의 세계라고 확신한다.
■ 구도자에게서 그리스도를 찾음
해방신학은 우리에게 사회의 변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그리스도를 찾으라고 가르쳤다. 하지만 교회 안에서 소외된 사람들, ‘우리와 함께 가지 않은’ 사람에게서 그리스도를 찾는 것도 필요하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이를 실행하려면, 무엇보다도 많은 것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금까지의 관념을 버려야 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겪으심으로써 근본적으로 변화되셨다. 복음이 전하듯이, 그분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그분을 알아볼 수 없었다. 우리에게 전해진 모든 것을 우리는 그대로 믿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그분의 상처에 손을 대는 것을 강력히 요구할 수 있다. 우리가 그분이 떠맡으셨던 세상의 상처, 교회의 상처, 육신의 상처 등에서 그분을 만나지 않는다면, 도대체 어디에서 그분을 더 확실하게 만날 수 있는가?
우리는 개종을 집요하게 권유하는 우리의 태도도 버려야 한다. 구도자를 가능한 한 빨리 회심시켜 우리 교회의 제도적이고 정신적인 기존 울타리에 가두어놓기 위한 계획으로 구도자에게 접근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집안의 잃은 양들’을 찾으셨지만, 그들을 당시 유다교의 기존 제도 안으로 인도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것을 아셨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전통의 보화로부터 새로운 것만이 아니라 옛 것도 발견해, 그것에 대해 구도자와 진지한 대화를 나누기를 원한다. 이런 대화를 통해 우리는 서로에게서 배울 수 있고 또 배워야 한다. 우리는 교회를 이해하고 있는 우리의 지평을 근본적으로 더 넓혀야 한다.
유다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된 초대교회는 그 역사 시초에 성전 파괴를 체험했다. 그 성전은 예수님이 기도하셨고 당신 제자들을 가르치셨던 곳이다. 이에 대해 당시 유다인은 창조적이고 용기 있는 해결책을 찾았다. 곧 파괴된 성전의 제단을 유다인 가정의 식탁으로 대신했고, 제사규정을 사적 기도나 공동 기도에 대한 규정으로 대체했고, 번제와 희생제를 입술과 생각과 마음 등의 제사, 기도와 성경 연구로 대체했다. 거의 같은 시기에 회당에서 추방되었던 초창기 그리스도교도 자신의 새로운 정체성을 찾았다. 그러니까 유다인과 그리스도인은 전통의 폐허 속에서 율법과 예언서를 새롭게 읽고 해석하는 것을 배웠다. 지금 우리도 이와 흡사한 상황에 있지 않는가?
■ 모든 것 안에 계신 하느님
5세기 초에 로마가 몰락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제각각 성급한 해석을 내놓았다. 이방인들은 로마의 몰락을 그리스도교의 수용 때문에 내려진 신들의 형벌로 보았고, 그리스도인들은 창녀 바빌론의 생활을 아직 근절하지 않았던 로마에게 내린 하느님의 형벌로 생각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러한 두 해석을 거부했다. 그는 그 변혁의 시기에 ‘두 왕국’의 영원한 싸움에 대한 신학을 발전시켰다. 그 두 왕국은 그리스도인의 나라와 이방인의 나라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속에 깃들여 있는 두 가지 ‘사랑’을 뜻한다. 그 하나는 초월에 닫혀 있는 자기사랑이고, 나머지 하나는 자기 자신을 내어주고 이를 통해 하느님을 찾는 사랑이다. 문명이 변화되는 이 시대는 현재 역사에 대한 새로운 신학과 교회에 관한 새로운 이해를 촉구하고 있지 않는가?
“우리는 교회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있지만, 교회가 어디에 없는지를 알지 못한다”라고 정교회의 신학자 예브도키모프(Evdokimov)가 지적한 적이 있다. 지난 공의회에서 다뤄졌던 ‘보편성’과 ‘교회일치운동’의 단어는 아마 새롭고 더 깊은 의미를 얻어야 할 것이다. 더 넓고 더 깊은 교회일치운동, 말하자면 더 용기 있게 ‘모든 것에서 하느님을 찾는’ 시대가 왔다.
이번 부활 시기를 그리스도를 새롭게 찾는 시기로 받아들이자. 죽은 이들 가운데서 살아 계신 분을 찾지 말자. 그분을 담대하고 지속적으로 찾자. 그분이 낯선 분으로 우리에게 발현하시더라도 당황하지 말자. 우리는 그분의 상처에서, 우리에게 다정하게 말씀하시는 그분의 목소리에서, 평화를 가져다주시고 공포를 몰아내시는 그분의 영에서 그분을 알아차릴 것이다.
※ 토마시 할리크 신부
토마시 할리크 신부는 체코 프라하 카를 대학 사회학 교수로, 체코 그리스도교아카데미의 회장과 프라하 아카데미 공동체의 주임신부를 역임하고 있다. 공산정권 하에서 비밀리에 사제품을 받고 지하교회에서 활동했던 할리크 신부는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템플턴상을 수상했으며, 옥스퍼드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