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자들에게 쏟아진 비난
당시 신자들은 자신이 신자인 것이 밝혀지면 감옥에 가거나 배교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신자들의 체포, 투옥, 형벌, 사형은 당시 비신자들에게 큰 관심사 중 하나였다. 최양업은 여덟 번째 서한에서 이같이 밝힌다.
“신자들의 집안이 몰락해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산다는 것, 사람이 살 수 없는 산속이나 산골짜기에 숨어서 비참하고 치욕적인 생활을 한다는 것… 부모와 형제와 친척들로부터 버림을 받고 잊혀 산다는 등의 신자들에 대한 험담이 비신자들 사이에서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제사와 위패를 배척한다는 이유로 불경스럽고 불충한 이들로 취급받은 신자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금수만도 못하다”는 비난을 감당해야 했다.
■ 권력 다툼에 이용된 천주교
최양업은 절골에서 쓴 서한에서 1801년 신유박해를 언급하며 “그때 천주교를 미워하는 원수들이 자기들보다 더 지혜롭고 임금님의 총애를 받으며 나날이 더욱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몇몇 유력한 천주교 신자들을 파멸시키기 위해 터무니없는 중상모략을 꾸며냈다”고 설명한다.
당시 왕이었던 순조. 그의 증조할머니인 정순왕후가 이끄는 벽파 세력은 반대파인 시파가 천주교에 개방적이었기에 그들의 세력을 꺾기 위해 천주교 탄압을 시작한다. 천주교와 연관이 있었던 순조의 형 은언군 이인이 그 희생양이 된다. 이에 대해 최양업은 “천주교의 원수들은 임금님에게 ‘천주교 신자들이 합법적인 금상 왕을 폐위하고 이인이라는 왕족을 새 임금님으로 옹립하려 한다’고 모함했다”고 밝힌다.
은언군 이인은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지만, 아내와 며느리가 신자였기에 천주교 신자들의 두목이자 반역자라는 모함을 받은 것이다. 왕족임에도 불구하고 천주교와 관련된 이들에게 가혹한 핍박이 가해졌다는 것을 서한을 통해 알 수 있다. “이인의 가족들은 형언할 수 없는 천대와 터무니없는 중상으로 산산이 흩어졌으며 어떤 아들들은 사형을 당했고 어떤 자손들은 극단적인 비참 속에 내버려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