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안위 위협하는 세력으로 규정해 천주교 박해의 근거 마련
교우들 시신 찾아 장례 치른 한덕운
남한산성 동문 밖에서 참수형 당해
신앙의 자유 위해 외세에 원조 청한
황사영 「백서」가 조정에 발각되면서
국가 전복시키려는 세력으로 낙인
자그마치 1년을 꼬박 이어진 신유박해는 조선 정부가 1802년 1월 25일 「토사반교문(討邪頒敎文)」을 반포하면서 일단락됐다. 이 교문은 이미 붙잡힌 신자들의 처형을 음력을 기준으로 신유년(1801년)의 해가 넘어가기 전에 마무리할 것을 명했다. 그래서 신유년 음력 12월에는 전국 각지에서 처형이 이어졌다. 남한산성도 그런 곳 중 하나다.
■ 남한산성의 순교
신유박해의 끝을 알린 「토사반교문」이 반포된 지 닷새 후인 1월 30일 남한산성 동문 밖에서 참수형이 집행됐다. 남한산성순교성지가 현양하는 복자 한덕운(토마스)의 순교였다. 한덕운은 신유박해라는 초유의 사태 한복판을 하느님을 향한 믿음 하나로 두려움 없이 걸어간 복자였다.
한덕운은 신유박해 당시 경기도 광주의 의일리(현 의왕시 학의동) 인근에서 기도와 독서를 열심히 하며 하느님의 뜻을 찾던 신자였다.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많은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지방으로 뿔뿔이 흩어졌지만, 한덕운은 도리어 옹기 장사꾼으로 변장해 서울로 갔다. 신자들의 사정을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그는 박해로 순교한 이들의 시신을 찾아 장례를 치렀고, 복자 홍재영(프로타시오)의 신앙에 훈계하는 등 박해시기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용감하게 신앙생활을 이어나가다 결국 포졸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한덕운은 복자 주문모(야고보) 신부의 입국 소식을 듣고 주문모 신부에게 성사를 받고자 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신유박해는 이 소원을 이루지 못하게 만들었다.
■ 주문모 신부의 자수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지 반년가량 흘렀을 때 밀고자를 통해 주문모 신부의 입국과 활동이 알려졌고, 조선 정부는 주문모 신부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신자들은 이 정보를 빠르게 알아차렸고, 주문모 신부를 경기도 양근, 충청도 연산, 황해도 황주 등으로 피신시키며 최우선으로 보호했다. 그러나 이를 위해 1795년 복자 윤유일(바오로)·최인길(마티아)·지황(사바) 등이 순교했고,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복자 강완숙(골롬바) 일가를 비롯한 여러 신자들이 잡혀 들어갔다.
많은 신자들이 고통받자 주문모 신부는 자신 때문에 신자들이 고통받는다고 생각해 중국으로 돌아가려 했다가 다시 ‘양떼와 운명을 같이해 순교로 모든 불행을 막아야 한다’고 여기고 4월 24일 의금부에 자수하고, 결국 순교했다.
주문모 신부의 뜻은 박해를 그치게 하는데 있었지만, 정작 주문모 신부의 자수는 점차 잠잠해지던 박해에 다시 불을 붙이는 사건이 되고 말았다. 조정은 이미 앞선 박해들로 사대부 가문의 인물들이 천주교를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으며, 이들이 외국 세력과 연결돼 있다는 심증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조정에게 주문모 신부의 자수는 천주교 신자들이 외국 세력과 연계돼 있을 것이라는 의구심에 확신을 준 것이다.
게다가 황사영(알렉시오)이 중국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려 했던 「백서」가 조정에 발각되면서 이 확신은 국가의 안위를 위협하는 문제로 발전됐다. 「백서」에 이른바 서양에 ‘대박청래(大舶請來)’를 제안하는 내용이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대박청래’란 유럽의 가톨릭 국가들이 조선에 무력을 지닌 큰 배를 보내 천주교의 자유를 요구해달라는 요청이다. 당시 박해로 생명의 위협을 당하던 신자들 일각에서는 ‘대박청래’라는 극단적인 방법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신자들 안에서는 이 방법에 대해 부정적인 이들도 많았다.
성 유진길(아우구스티노)이나 성 정하상(바오로)은 기해박해 당시 문초에서 “황사영은 역적”이라고 답변했다.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도 “이 편지의 마지막 부분은 쓰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 평가했다.
샤를르 달레 신부는 「한국천주교회사」에서 “그(황사영)가 바른 의향을 가지고 있었고, 교우들의 해방과 외교에 대한 복음의 승리, 하느님의 승리를 고려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흥분한 상상에서 나온 유치한 계획은 무모하고 위험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 신유박해의 영향
신유박해는 최초의 대대적이고 전면적인 박해였다. 규모나 기간 면에서도 이례적이었던 이 박해로 유일한 사제였던 주문모 신부가 순교했고, 교회 지도층의 대부분이 순교하거나 유배되거나 산속으로 숨어 들어가 교회가 조직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힘을 잃고 말았다.
더욱이 박해를 마무리하면서 반포된 「토사반교문」은 신자들을 국가를 전복시키려는 세력들로, 불효를 저지르는 무리들로 규정하면서 언제든지 박해가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근거로 작용했다. 그래서 신자들은 신유박해가 끝난 후에도 가족, 친족, 이웃들에게 박해를 받게 됐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살던 곳을 떠나야 했다. 그런데 이것은 오히려 천주교가 더 넓은 지역으로 퍼져나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또한 조정 입장에서도 천주교에 대한 온건론이 사라지게 만들고, 척사론을 공고하게 만든 결정적인 사건이기도 했다. 특히 서양에서 온 천주교가 외세 침략과 결부됐다는 인식이 자리잡으면서, 서양에 관련된 모든 것을 배척하는 척사론이 강해졌다. 이전에는 실학 등 천주교라는 종교와는 별개로 과학기술을 연구하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신유박해 이후 서양의 과학기술도 사학(邪學)으로 몰아붙여 배척하게 됐다. 이는 다양한 학문과 기술을 수용·발전시키지 못하게 해 근대화에 뒤처지는 결과로도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