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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인터뷰] 유럽 현대음악계 대표 작곡가 박-파안 영희 교수

주정아 기자
입력일 2007-10-21 수정일 2007-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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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언어는 사랑으로 귀결됩니다”

최양업 신부의 삶 드러낸 ‘영성음악’ 작곡

모든 작품에서 휴머니즘·인간 존엄성 강조

박-파안 영희(소피아, 63) 독일 브레멘국립예술대학 교수. 우선 약력부터 밝혀야겠다. 한국에서는 전문 음악인들과 음악과 학생들 외에는 잘 모를 것이라는 기우에서다. 정작 박교수는 고국에서 자신을 잘 모르는 것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먼저, 박교수에게는 현재 유럽의 현대음악계를 이끌어가는 대표적인 작곡가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다닌다.

지난 1974년 독일 학술교류재단 장학생으로 도독한 그는 당시 한국적 음악과 문화유산을 서구적인 작곡 기법을 통해 새로운 사고와 방향성으로 제시해 이목을 집중시켰다. 1978년 스위스 보스윌 세계작곡제에서 1등상, 79년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주최 작곡 콩쿨에서 1등상, 80년에는 독일 슈튜트가르츠시 주최 작곡콩쿨에서도 1등상을 받았다.

80년에는 전세계 작곡가들의 꿈의 무대인 독일 도나우에슁엔 현대음악제에 외국인으로서 뿐 아니라 여성작곡가로서는 처음으로 위촉, 명성을 떨쳤다. 1994년에는 브레멘국립예술대 정교수로 임명됐다. 독일어 문화권 사상 첫 여자 정교수. 유럽이 또 한번 들썩였다.

한국에서는 지난해 국민훈장 석류장을 수상했고, 서울대 개교 60주년 기념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으로도 선정됐다.

이쯤하면 다시 이름에 대한 궁금증도 떠올릴 것이다. ‘파안(琶案)’. ‘책상에 놓여진 비파를 보며 생각한다’라는 뜻이다. 박교수의 지인들은 그에게 썩 잘어울리는 예명이라고 평가한다.

박교수는 10월 13~14일 열린 국립국악관현악단 국가브랜드 연주회 일정에 맞춰 잠시 방한했다. 이 연주회에서 그는 ‘온누리에 가득하여 … 비워지니’라는 제목의 위촉곡을 선보였다. 도교를 주제로 한 곡이다.

박교수는 이전에도 그의 작품 안에서 노자, 장자에 대해 애정을 보여왔다. 대뜸 ‘그리스도교 신자가 왜 도교를 택했냐’고 질문을 던졌다.

“저에게 도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삶의 철학이고 학문이고 사고의 한 방법이지요. 도교는 ‘비워지는 과정’에서 그리스도교와 공통점을 갖습니다. 우리 삶의 모범은 모든 것을 비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시지요. 도교를 주제로 했지만, 이 음악이 말하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그동안 박교수의 작품평 등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설명들이 연이어 쏟아졌다. 내심 신앙고백을 듣는 듯한 착각도 스쳤다. 박교수는 자신도 모르게 흘러넘치는 신앙으로 충만해보였지만, 그즈음 기자가 맥을 한번 끊어보았다.

천상병, 김지하 시인의 시는 그렇다 치더라도 정철의 속미인곡 등의 가사작품과 그리스 신화 등은 그리스도교 신앙과 거리가 있지 않느냐고.

“저는 인간의 삶이 어떻게 되어가는 가에 대해 음악으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인간은 삶 안에서 끝없이 갈등하고 방황합니다. 예를 들어 그리스 신화에서도 인간이 갖고 있는 속성들을 잘 드러내지만 그것은 끝없는 싸움으로 나타납니다.

그에 반해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방황의 끝에는 밝은 빛이 있다는 것을 거꾸로 이야기할 수 있지요. 속미인곡의 가사에서는 ‘맺힌 것’을 푸는 일이 시인의 의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제가 음악을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하지요.”

그렇다고 해도 그리스 신화를 소재로 한 작품 ‘이오(IO)’가 이민자들에 대한 차별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각 작품마다 사회의식을 담는 것도 부담스럽지 않는냐는 질문에 그는 “성경을 보면 의식없이 나열한 말은 한구절도 없다”고 명료하게 대답한다.

“제 모든 작품은 일종의 사회의식을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정치적인 것도 아니고, 어떤 시위를 하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저는 단지 휴머니즘을,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을 뿐입니다.”

특히 박교수는 모든 작품에 ‘겸손’이라는 주제를 함께 녹여내는 작곡가이다. 그런 그가 최근 ‘겸손’을 드러낼 가장 한국적인 인물을 찾았다고 한다.

“예수님의 겸손의 길을 그대로 걸으신 분이 바로 최양업 신부님이 아니신가 합니다. 누구든 겸손하라고 닦달한다 해서 겸손해지긴 어렵지요. 단지 ‘나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행위만이 있을 뿐입니다.”

음악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언제 어떤 것이 되었든 ‘사랑’으로 귀결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최신부의 라틴어 서한내용에 푹 빠져든 박교수는 벌써 최양업 신부를 현양하는 연주곡 두편을 완성했다. 물론 최신부의 서한에서 발췌한 글귀를 주제로 삼았다.

청주교구의 오라토리오 위촉으로 인해 시작한 일이지만, 박교수 스스로가 더욱 빠져들어 장장 7편의 대서사시를 창작할 예정이다.

그 첫 작품 ‘빛 속에서 살아가면’은 테너독주와 관현악단을 위한 곡이다. 19일 독일 도나우에슁엔 현대음악제에서 초연됐다. 두 번째 곡 ‘보소서 주여, 우리의 비탄을 보소서’는 무반주 합창곡으로 내년 3월에 초연된다.

박교수는 쾰른방송국 위촉 작품으로 이 곡을 제시했다. 박교수 덕분에 우리는 가만히 앉아서 가장 한국적인 영성이 전 세계 무대에 먼저 알려지는 자랑스러운 기회를 얻었다. 국내 연주일정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창작음악을 접할 기회가 많지 않고, 대중들도 다소 어렵게 느낀다. 박교수가 내놓는 작품은 주로 음악회용 연주곡이라는 것도 부담이 될 수 있다.

“현대음악 중에는 연주하기 쉬운, 듣기 쉬운, 그때그때 유행에 따른, 즉 팔기 쉬운 음악 경향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경향을 따라간 적이 없고, 제 음악은 어떤 장르나 파에 속한 적이 없습니다. 저는 한자리에 서서 깊이를 찾는 사람입니다. 그 깊이는 오로지 그리스도께 가닿길 바랍니다.”

굳이 대중의 이해를 돕기 위해 박교수의 작품을 여느 장르로 뭉뚱그리자면 기자는 ‘영성음악’ 정도로밖에 표현할 수 없겠다.

“음악이 어렵고 쉽고 판단보다는, 예컨대 단 한사람이라도 최양업 신부인 관련 곡을 듣고 마음이 움직여 최양업 신부님 관련 책을 읽거나 묵상의 기회를 갖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합니다.”

박교수는 최양업 신부 관련 창작음악 외에도 천주가사를 창극으로 만들 계획도 있다.

“저는 생각을 음으로 표현하는 은총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소명을 받아들여 공부만 했을 뿐 작곡가를 만든 것은 하느님의 도우심과 수많은 이들의 기도입니다. 혼자 힘으로 된 것이 아니기에 더욱 많은 이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박교수의 좌우명은 교황 요한 23세의 글에서 인용한 “너 자신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말라.”이다. 그리고 그는 수십년째 무릎을 꿇고 한음 한음 오선 위에 옮기며 작곡에 임한다.

주정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