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교구 홍용호 주교의 비서로 공산치하의 북한교회에서 첫 순교자가 된 강창희 야고보의 희생은 평양교구에 이어지는 숱한 박해와 탄압의 서막이었다. 일제시대 때 강제로 징발된 성당을 되찾으려던 강창의의 노력은 결실을 얻었지만 자신은 세 발의 흉탄에 쓰러져 운명을 달리하는 비극을 맞았다.
1945년 8월 15일 평양교구장 홍용호 주교는 일본군에게 징발되어 고사포 진지로 사용됐던 관후리 성당 부지를 되찾는 일에 착수했다. 홍주교는 우선 교회측 책임자로 부주교인 신부를 임명하고 그의 보조자로 주교 비서이면서 당시 평양교구 재단 사무를 맡고 있던 강창희를 임명해 부주교를 돕도록 했다.
부주교 김필현 신부와 강창희는 우선 평양시 인민위원회 위원장 한근조를 찾아가 관후리성당을 교회로 반환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그는 위원장 단독으로 결정할 수 없는 문제로 위원회의 회의를 거쳐서 해결해주겠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몇 주 후 성당을 되돌려 줄 수 없다는 대답이 왔고 이에 따라 평양교구 측은 소련군 사령부의 자문으로 다시 인민위원회에 반환 문제를 상정시켰고 당시 평안남도 도 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으로 있던 조만식 선생을 방문해 협조를 청했다.
10월 마침내 한달반을 끌어오던 성당대지 반환 문제를 매듭짓기 위해 교회측 대표로 김필현 신부와 강창희, 소련군 사령부 대표 장교 한 사람과 도 인민위원장 조만식 선생 그리고 평양시 인민위원회 대표가 참석해 회합을 가졌다.
여기서 원만한 합의가 이뤄졌으나 다음날 주교관에 도착한 서류에는 문제의 대지를 평양시에서 일시적으로 대여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이에 강창희는 그날로 시 인민위원회에서 보내온 문서와 함께 홍주교의 성명서 한통을 갖고 단독으로 시 인민위원회를 찾아가 교회의 권리를 주장하며 싸웠다. 그리고 그는 친구 김현준(요한)의 집에서 저녁식사를 한 후 주교관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가 주교관을 향해 옛 숭실전문학교 담을 끼고 걷고 있을 때 세 발의 총탄이 날아와 그를 쓰러뜨렸다.
다음날 새벽 주교관 사무실에서 사제서품을 앞두고 있던 조문국 부제가 보안서원으로부터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새벽 순찰 중 강창희가 죽어있는 것을 발견했으니 시신을 찾아가라는 것이었다. 조부제는 날이 밝기를 기다려 윤공희 부제, 지학순 신학생과 함께 강창희의 집을 들러 현장으로 달려갔다.
오른쪽 옆가슴에 총알이 뚫고 들어가 심장을 관통하고 왼쪽 팔을 부러뜨렸다. 목격자는 없었지만 관후리 성당 대지 문제를 둘러싼 저간의 사정을 살펴볼 때 그를 눈에 가시처럼 여겼을 공산당이 저지른 만행임이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홍용호 주교는 강창희의 시신을 붙들고 『어째서 나를 두고 혼자 갔느냐』며 크게 애통해 했다. 비록 그는 흉탄에 갔지만 그 희생은 결실을 맺어 관후리 성당 대지는 마침내 교회로 되돌려졌고 모든 성직자와 신자들은 주교좌 대성당 건축 사업을 맨주먹으로 시작하게 됐다.
강창희는 1912년 9월 평안남도 평원군 검산면 신지리 일명 섭가지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이곳은 유서깊은 교우촌으로 평양 다음으로 본당이 설립돼 뒷날 영유, 숙천, 안주본당의 모체가 된 고장이다. 강창희는 이곳 섭가지 공소의 초대 공소회장인 강용기(베드로)의 일가로서 뿌리깊은 가톨릭 신앙 속에서 살았다.
국민학교 과정을 마친 후 영유에서 중학, 그리고 일본 나고야에서 동해상업학교를 다니던 중 3학년 때 중최하고 고향에 계신 홀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귀국했다. 그는 귀국 다음해인 1934년 순경 채용 시험에 응시, 합격해 중화에서 1년동안 순경 생활을 했다.
그러던 중 1936년 6월 그는 교구 재단 사무를 맡게 됐다. 모든 맡겨진 일들을 책임있게 완수해내던 그는 특히 교구장 오(吳, O'Shea) 주교의 신임을 받았다. 일본이 미국에 선전포고를 한 뒤 적성국 국민이라 하여 강제추방을 당하게 된 메리놀회 성직자들이 평양교구를 떠날 때 그는 오주교와 당시 순천본당 주임으로 교구 사무를 인수하게 된 홍용호 신부 사이를 오가며 인수인계를 집행하는 임무를 극비리에 수행하기도 했다.
그는 일찍부터 교회 대표로 각종 사회회합에 참석했고 광복 직후 여러 민주적 애국 단체가 공산당에 맞서 정치 활동을 전개할 때에도 적극 참여했다. 이러한 그의 활동은 항상 공산당의 눈밖에 났었고 결국 관후리 성당 대지를 되착기 위한 끈질긴 노력으로 급기야는 공산당에 의해 희생된 최초의 북한 지역 순교자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