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생명을 살리자” 1. ‘태아를 살리자’ (중) ‘법이 죽음을 허하다’

주정아 기자
입력일 2017-02-21 수정일 2017-02-22 발행일 2017-02-26 제 3033호 11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45년째 법<모자보건법 제14조>은 낙태 앞에 침묵한다
교회, 모자보건법 제14조 개정 외쳐
정부는 10여 차례 법 개정 나섰지만 낙태 허용하는 독소조항 계속 유지

지난 1월에 열린 미국 워싱턴 생명대행진 ‘로즈 디너’에서 한 신자 경찰관의 일화가 소개됐다. 티모시 돌란 추기경(뉴욕대교구장)이 전한 내용이었다.

그 경찰관은 범인 검거 과정에서 범인이 쏜 총 세 발을 맞고 중환자실에서 혼수상태로 지냈다. 3개월 후에야 겨우 의식을 회복했지만, 목 아래로는 전혀 움직일 수 없는 장애를 갖게 됐다. 그런데 경찰관이 자신의 장애를 알고 처음 한 말은 “나는 그를 용서합니다”였다. 자신을 쏜 범인을 용서한 것이었다. 이후 경찰관은 교도소와 병원 등을 방문하면서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용기와 위로를 전하는 몫을 적극 실천하고 있다.

돌란 추기경은 “자기 한 몸도 제대로 가눌 수 없는 이 경찰관은, 경제적이고 실용적인 가치, 효용성의 관점에서만 본다면 사회에서 무가치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면서 “그런데 수많은 이들이 ‘빛’의 세계로 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는 이 경찰관이 정말 존재 가치가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이어 말했다.

“힘없는 태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 저항할 수도 없고 약한 이 태아들을 한 명 한 명 낙태하는 것은, 우리의 미래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경찰관을, 의사를, 그리고 내 형제를 포기하는….”

법, 관습, 도덕, 종교 등을 흔히 사회규범이라고 부른다. 특히 ‘법’은 국가 권력에 의해 강제되는 사회규범을 말한다. 그런데 바로 이 법이 생명이 어리다고, 약하다고, 장애가 있다고, 성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원치 않는다고 죽일 수 있도록 허가한다면? 우리는 그저 침묵해야 할까?

낙태 허용 조항을 포함한 모자보건법 제14조의 개정 혹은 폐지는 가톨릭교회의 숙원이다. 그러나 45년째 낙태 금지와 낙태 허용을 외치는 목소리들은 팽팽히 맞서고 있다.

■ 45년째 낙태 허용 조항 유지

세계 각국에서는 기본적으로 낙태 금지를 위해 법을 만들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인구 증가와 식량 부족, 여성 권리 신장 등을 이유로 낙태를 법적으로 허용하는 나라들이 늘어났다. 또 태아를 인간으로 보는 시점과 모체의 건강 보호라는 입장에 여성의 자기 결정권이 추가되면서 법적 허용뿐 아니라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려는 움직임도 거세게 이어져왔다.

한국에서는 태아를 인간으로 여기는 전통적 시각에 힘입어 낙태가 흔하게 발생하진 않았다. 즉 법으로까지 규제해야할 필요성이 없었다. 이후 일본 형법의 영향을 받아 1953년엔 형법으로 ‘낙태죄’를 규정하게 됐다. 현재 우리나라 형법 제269조와 270조는 낙태죄를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1960~70년대 가족계획은 산아제한에 중점을 두고 진행돼 낙태를 공공연하게 부추겼다. ‘낙태죄’를 사실상 사문화시킨 것이다.

급기야 정부는 1973년 모자보건법을 제정하면서 낙태 허용 사유를 정했다. ‘낙태죄’로 처벌받아야 하는 범위를 제한하는 법적 완화조치였다. 이후로도 정부는 수차례에 걸쳐 낙태 허용 범위를 확대해 이른바 ‘낙태죄’를 없애는 법 개정을 시도했지만, 가톨릭교회를 비롯한 종교계의 반대로 확대 개정은 하지 못했다.

‘모자보건법’은 조건에 따라 낙태를 허용할 뿐 아니라 반생명적인 시술 등도 지원하는 독소조항을 포함한다.

모자보건법 제14조 1항은 ▲본인이나 배우자가 우생학적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 질환 또는 전염성 질환이 있는 경우 ▲강간 또는 준강간에 의한 임신 ▲혈족 또는 인척 간 임신 ▲모체 건강을 심각하게 해치는 경우 등일 때, 24주 이내 태아에 대한 ‘인공임신중절수술’ 즉 낙태를 허용한다. 여성이 부득이한 사유로 배우자의 동의를 받을 수 없을 때는 본인의 의지로 낙태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도 바로 이 조항이다.

가톨릭교회는 이 법의 제정 이전부터 이 법의 부당성과 역기능을 밝히고, 제정 반대를 비롯해 지속적인 개정 및 폐지 노력을 펼쳐왔다. 이후 정부는 10여 차례 법을 개정했지만, 독소조항은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다만 2009년 개정 당시 임신 28주까지 낙태를 허용하던 조항을 24주로 강화하고, 우생학적·유전학적 질환 중 치료가 가능한 혈우병 등의 질환에 대해서는 낙태를 금지하는 조항을 추가했다.

■ 법과 현실의 괴리

지난해 9월 보건복지부는 ‘의료법 시행령 개정안’을 예고했다. 불법 낙태 수술을 비롯해 8가지 비도덕적 진료행위를 할 경우, 의료자격을 최대 12개월까지 정지시킬 수 있도록 하는 ‘의료인 면허제도 개선방안’이었다. 의료법상 낙태는 ‘비도덕적인 진료행위’로 간주된다.

의사들은 물론 여성단체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보건복지부는 재검토하겠다면서 한 발 물러섰다. 하지만 의료계와 일부 여성계, 법조계까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사문화된 낙태죄를 개정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들은 모자보건법이 지나치게 엄격하다면서 낙태를 보다 쉽게 할 수 있도록 개정하자고 주장한다.

낙태를 반대하는 입장에서도 현실과 괴리가 있는 사문화된 모자보건법 조항을 개정 혹은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적인 변화는 인간생명 존중 정신을 바탕으로 낙태 예방을 위해 필요한 법 정비다.

게다가 지난달 대한산부인과의사회와 윤종필 국회의원(자유한국당)이 공동 주최하고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가 주관한 ‘불법 인공임신중절수술 논란에 대한 해결책’ 토론회에서는 국내에서는 실제 하루 평균 3000여 명 이상이 낙태수술을 하고 있고, 그 중 95%는 불법이라는 추정이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검찰청 범죄 분석 결과, 낙태 관련 범죄자 처분은 연간 50~70건에 머무른다.

법적 처벌이 존재하지만 실제 처벌하지 않고, 법적 강제율은 다른 나라에 비해 강력하지만 낙태율은 매우 높은 것이 바로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 올바른 개정을 위해

모자보건법이 쉽게 개정되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로는 우선 인간 존엄성에 대한 의식이 비뚤어지고 희박해져가는 사회 분위기를 꼽을 수 있다.

특히 이성효 주교(주교회의 생명운동본부장)는 “여성의 가치가 제자리를 찾지 못하면 태아를 살릴 길이 없다”고 토로했다. “여성을 그저 성적 도구로 바라보는 시각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근본적으로 낙태를 막을 길이 요원한 것이 사실”이라는 설명이다. 무엇보다 정부가 구체적으로 법과 관련 정책을 개선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촉구하고, 대사회적인 인식을 개선시켜 나가는데 노력을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구체적으로는 법 적용 및 집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문제점이 제기된다. 법학 전문가들은 구체적으로 각 법조항의 구체적인 시행령과 시행규정만 올바로 정해도 마구잡이식 낙태 정도는 막을 수 있다고 조언한다.

그런데 최근 우리사회에서 이른바 법 전문가들이라고 불리는 이들의 50.9%는 낙태에 관해선 의학적·사회윤리적·법률적 사유에 한해 확대할 수 있다는 입장을 보인다. 임신부의 자기결정권 보장을 위해 확대해야 한다는 의견도 35.8%였다. 생명경시 풍조를 우려해 확대를 반대한다는 답변은 12.8%뿐이었다. 한국법제연구원이 지난해 7~9월, 입법·사법·행정 분야를 비롯해 학계와 법률전문가, 예비 법 전문가 1012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차희제(토마스·프로라이프 연합회 및 의사회) 회장은 “낙태 단속과 처벌이 문제 해결의 핵심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와 같이 낙태율이 심각한 상황에서는 법적 구속력 동원이 하나의 돌파구가 될 수 있다”는 의견을 밝힌 바 있다.

아울러 각계 전문가들은 법 개정에 앞서, 혹은 동시에 실천해야 할 노력으로 태아와 여성에 대한 존중감 회복, 낙태를 하지 않아도 되는 환경 조성, 남성의 양육 책임 강화, 낙태 논의의 공론화 등을 제시했다.

주정아 기자 stella@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