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4월 24일부터 27일까지 교황대사 이반디아스 대주교님의 초청으로 알바니아를 방문했다. 이번 알바니아 여행은 유럽 공산 국가들 중 마지막으로 공산주의의 굴레를 벗어난 알바니아의 사회상과 교회 실정을 살펴볼 수 있는 값진 기회였다.
알바니아는 유럽 공산 국가들 중 유일하게 중국 신공산주의를 택하였으나 그 결과는 유럽의 가장 가난한 나라로 뒤쳐지게 된 농업국가이다.
할 일 없어 하루 종일 거리를 서성거리고 있는 수많은 실업자들, 이들의 허름한 옷차림, 온 식구의 하루 양식이라는 커다란 식빵을 옆구리에 끼고 집으로 가고 있는 사람들. 이들이 엮어내는 광경은 50년대 말 우리나라의 모습을 연상시켜 주는 것이었다.
알바니아의 낙후된 경제상은 수도인 티라나 공항의 초라한 모습에서부터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노면이 고르지 못해 비행기로 하여금 덜컹거리게 하는 활주로, 비행기에서 불과 1백여 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낡은 청사는 이 나라가 얼마나 국제적인 교류 없이 폐쇄된 생활을 해왔었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내 주는 것이었다.
◆벙커 전국 26만5천 개
비자를 발급 받고 간단히 입국 수속을 마친 다음 티라나 시내로 들어가면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산과 들을 덮고 있는 군사용 벙커였다. 벙커 하나에 들어간 시멘트와 철근의 무게가 22톤이며 대포까지 장치할 수 있는 대형 벙커에는 아파트 한 채를 지을 수 있는 시멘트와 철근이 들어갔다는 이 벙커는 실로 알바니아 전국 도처에 깔려 있어 26만5천 개나 된다니 인구 12명에 벙커 하나인 꼴이다. 외침에 대비한다는 구실로 국민들의 허리띠를 졸라매게 한 이 벙커는 공산 독재자들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만행이 얼마나 심각했었던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어서 보는 이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필자가 도착한 다음 날은 마침 교황 방문 1주년 기념미사가 알바니아 북부의 스쿠타리 대서당에서 있었다. 교황 대사님과 작년에 교황님께 서품 받은 알바니아 주교님 네 분, 20여명의 사제단이 공동 집전한 이 미사는 2천여 명의 신자와 알바니아 국회 의장과 정부 요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알바니아어로 성대히 봉헌되었다.
스쿠타리는 인구 8만 명 중 절반이 가톨릭 신자인 알바니아 가톨릭의 중심지이다. 스쿠타리 대성당은 발칸반도에서 제일 큰 성당인데 공산정권 하에서는 3천 명을 수용하는 체육관으로 개조하여 사용하던 것을 교회가 반환 받아 성당 내부에 설치 됐던 시멘트 스탠드를 헐어버리고 성당으로 복원됐으며 아직 중앙 제대는 복원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체육관으로 바뀐 성당
대성당을 가득 메운 신자들의 소박하고 겸손한 모습에는 모진 박해를 끈질기게 이겨낸 영웅적인 신앙인의 경륜이 배어있는 것을 보는 것 같아 마음 한 구석 설레임을 느끼기도 했다. 수많은 신자들이 영성체하는 것을 그저 당연하게만 여겼지만, 이반디아스 대주교님은 자신의 부임 초 미사 때에는 불과 몇 안 되는 사람만 영성체했었다며 그때와 비교하면 실로 커다란 변화라고 귀띔해준다. 이반디아스 대주교님의 설명에 따르면 처음에는 박해시대에 어쩔 수 없이 혼인성사를 받지 못한 신자들이 혼인조당 때문에 감히 성체를 영하지 못했으나, 이들의 사정을 고려하여 최근 교황청에서는 이들의 마지막 혼인을 적법한 것으로 인정해 주었기 때문에 알바니아 신자들이 혼인조당을 벗어나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국민 10퍼센트가 신자
기념미사 이 외에도 교황 방문 1주년 기념으로 요한 바오로 2세의 흉상 제막식도 있었다. 이 흉상은 알바니아 신자들이 당신의 흉상을 제작하려고 하지만 제작비를 마련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교황님께서 이태리의 유명한 조각가 만치니가 제작한 흉상을 선물로 보내주신 것이다.
알바니아사람들(인구 3백20만 명)은 비록 70퍼센트가 회교도들이고 20퍼센트는 정교회 신자들이며 가톨릭 신자는 10퍼센트(약 30만 명)밖에 안 되지만 이들의 교황님께 대한 존경심은 실로 남다른 데가 있는 것은 이날 스쿠타리 대성당 앞 광장을「요한 바오로 2세 광장」으로 명명한 것에서도 단적으로 볼 수 있다.
알바니아인들은 사회 발전을 위해 가톨릭교회에 커다란 기대를 걸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은 살리 뻬리샤 대통령이 알바니아 출신인 마더 데레사 수녀님에게 수도 티라나에 대지 5천 평방미터를 내놓으며 병원 건립을 요청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이 요청을 당시 알바니아 교회 전체의 책임 주교였던 이반디아스 대주교님께 위임했고 현재 병원 건립 사업은 알바니아 주교회의가 주관하고 있다.
병상 1백32개를 갖춘 종합병원(착한 의견의 성모병원)과 의과대학을 아울러 세우게 될 이 사업은 총 1천5백50만 달러가 소요되는데 이태리의「무염시태의 아들들 수도회」가 이 중 건축 공사비 이 외의 8백50만 달러를 부담하기로 함에 따라 알바니아 교회는 나머지 7백만 달러를 모으기 위해 세계 각국 교회에 도움을 청하고 있다.
◆신학교 92년도에 개교
이미 한국의「가톨릭신문」은 이 요청에 응답하여 모금운동을 전개하였고 이 소식을 들은 이반디아스 대주교님은 한국 교회의 이러한 연대운동은 알바니아 사람들에게 커다란 도움과 격려가 된다고「가톨릭신문」에 감사의 뜻을 전해 달라고 필자에게 당부했다.
모든 것이 낙후되어 있는 알바니아에 병원 시설이라고 예외일 수는 결코 없으며 약품 또한 크게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혹시 아프리카의 극빈국가들보다는 알바니아가 사정이 나을런지도 모르지만 반 세기 동안의 혹독한 박해에 신음한 국민들임을 생각하면 북한의 같은 처지의 형제 자매들이 있는 우리로서는 이들에게 남다른 연대감을 느낄 법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의미에서 알바니아는 교회가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 전체를 위해서 존해한다는 사실과 교회는 실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전 세계 교회가 친교로 맺어져 있다는 사실을 증거할 수 있는 훌륭한 장이라고 할 수 있다.
◆최초의 무신론 선포국
스쿠타리의 신학교는 92년에 문을 열고 현재 예수회 숙사를 임시로 빌려 예수회에서 운영하고 있는데 현재 알바니아 여러 교구와 수도회 출신 신학생 90명이 공부하고 있다. 이들 중 60명은 신학교에서 기숙하고 30명은 밖에서 통학하는 학생들이다. 이들 중 사제가 배출되려면 10년은 더 기다려야 되니 그동안 알바니아 교회는 박해에서 살아남은 노사제들과 외국 선교사들의 활동에 의지하는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1945년 공산화되기 이전 알바니아 교회에는 주교 7명, 신부 약 2백 명, 수녀 약 2백 명이 있었지만「세계 최초의 무신론 국가」임을 선포하고 무자비하게 교회를 탄압한 공산 정권하에서 반 세기동안 혹독한 박해를 거치면서 이들은 거의 다 목숨을 바쳤다. 4년 전 까따꼼바에서 나온 알바니아 교회에는 교구 사제 15명, 프라치스코회 소속 9명, 예수회 소속 2명의 신부와 수녀 42명밖에는 살아남지 못했다.
더욱이 이들은 모두 일흔 살이 훨씬 넘었고 수녀님들 중에는 수련수녀 시절 공산화를 당해 45년 이상이나 기다린 끝에 마침내 최근에야 수도서원을 한 분들도 있다.
이 분들 중 특히 92세의 미켈콜리키 몬시뇰 댁으로 방문한 것은 매우 감격적이었다. 38년을 감옥 생활에 시달렸으면서도 해맑은 얼굴에 평온한 모습을 지니고 있던 콜리키 몬시뇰, 워낙 알바니아 전국적으로 유명한 분이어서 공산 당국도 감히 이분의 목숨에는 손을 대지 못했다는 노사제는 필자를 보고 유창한 이태리말로 남한에서 왔냐 북한에서 왔냐고 물어보고는 북한 교회를 위해 기도해 달라는 필자의 요청에 자신은 감옥에 있던 박해 시대에도 항상 희망을 지니고 있었고, 북한 신자들도 희망을 잃지 않고 있을 것이라고 힘주어 말하기도 했다. 허름한 처소였지만 한사코 교황 대사님께 상좌를 권하던 콜리키 몬시뇰, 그분에게서 필자는 참다운 목자의 모습, 멜키세덱의 품급에 따른 영원한 사제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알바니아를 떠나기 전날 필자는 이반디아스 대주교님이 교구장 서리로 있는 남부 알바니아의 코르챠와 엘바산의 교회 공동체를 방문했다. 티라나에서 자동차로 산길을 달려야 하기 때문에 왕복 12시간이 넘는 강행군이어서 다소 피곤하긴 했지만 매우 뜻있는 여정이었다.
◆회교지역 선교도 활발
코르챠에는 신자라고는 아무도 없는 곳에 일 년 전에 카나다에서 선교사제로 도착한 게리월시 신부가 성당을 짓고 이제 신자 수 1백20여명이 되었으며 이들 중 20명은 지난 부활절에 세례를 받았고 이번 성신강림대축일에 견진을 받았다. 이 지역에 파견된 여러 수도회의 수녀님들과 말타에서 온 평신도 교리교사들의 헌신적인 활동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엘바산에서는 이태리의 도미니코회 수녀님들이 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임시로 세워진 조립식 건물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교황대사의 기타 반주에 따라 함께 노래하고 우리와 함께 기념 촬영도 했다. 이러한 광경에서 필자는 신자라고는 아무도 없는 회교도 지역인 남부 알바니아에서 교회가 서서히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코르챠와 엘바산에서 필자는 그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선교사들에게 한국 교회에 대해 소개하고 의견을 나누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알바니아를 둘러보며 필자는 줄곧 북한을 생각했다. 아직도 벙커를 뛰쳐나오지 못한 북한 동포들을, 아직도 까따꼼바의 어두움을 벗어나지 못한 북한 교회를 생각하며 하느님께서 알바니아 교회에 하셨듯이 북한 교회에도「복음의 새봄을 준비하고 계심」(요한 바오로 2세,「교회」의 선교사명 86항)을 굳게 믿어 의심치 않는 마음이다.
알바니아 교회가 겪은 반 세기의 박해, 그것은 분명히 고통의 역사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영광의 역사이기도 하다.「순교자의 피는 그리스도인의 씨앗임」을 오늘의 알바니아 교회는 웅변으로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