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

조선왕조 마지막 황녀 이마리아 할머니 선종

김기태 기자
입력일 2019-09-05 수정일 2019-09-05 발행일 1987-04-19 제 1551호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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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죄 보속에 여생 바쳐…
조부 대원군의 천주교인 학살 속죄
간첩 누명으로 10여년간 옥고 치루기도
교도소 방문한 수녀에 의해 예순 넘어 신앙 접해
단기간으로는 세계 역사상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천주교를 혹독하게 박해한 대원군. 그의 마지막 손녀이자 조선왕조의 마지막 비운의 황녀 이문용(마리아) 할머니가 할아버지의 죄과를 속죄하는 뜻에서 황혼기에 천주교로 귀의, 쓸쓸한 보속의 여생을 보내다가 지난달 28일 오후 5시 30분경 전주시 풍납동 이태조의 영정이 모셔진 경기전에서 파란만장했던 일생을 조용히 마무리 지었다. 향년 87세.

장례는 전주이씨 종친회의 장례위원회(위원장ㆍ이춘기)에서 5일장으로 결정, 4월 1일 치러졌다.

특히 이 마리아 할머니는 별세하기 10분전까지 15년 동안 매주 토요일 그녀를 방문, 보살펴온 한 수녀의 정성어린 병간호를 받았을 뿐 아니라, 장례식에서는 그녀에게 세례를 준 신부가 장례예절을 맨 처음 시작할 정도로 천주교와 깊은 관련을 맺어 또 한번 하느님의 오묘한 섭리를 헤아리게 했다.

1900년 고종의 총애를 받던 임상궁의 몸에서 태어난 할머니는 태어나자마자, 파란만장한 일생을 예고라도 하듯 비운의 첫발을 디뎌야했다.

영친왕을 낳은 엄상궁의 질투를 피해야 했던 것. 우여 곡절 끝에 시골의 한 농부의 손에 맡겨져 커 오다가 5살 때 보살펴 주던 농부가 죽자 그길로 9살 때까지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며 거지생활을 했다.

후에 고종이 할머니를 수소문한 끝에 겨우 찾아 창경원 앞 원남동에 집을 마련해주고 궁중예법을 배우도록 했다.

이때 고종은 임상궁을 시녀로 보내면서 왕족간의 암투를 우려, 『엄마라고 밝히지 말고 이모라고 부르도록 해라』고 엄명을 내렸다고 한다.

할머니는 자신을 보살펴 준 시녀가 엄마인지도 모르고 자랄 만큼 비운의 어린 시절을 맛보아야했다.

이 할머니는 16세 때 우국지사 김한국의 아들 김희진과 결혼했으나 결혼직후 남편과 사별하고 돐도 채 안된 아들마저 잃어 불행은 겹쳐지기만 했다.

해방 후에는 좌익 운동하던 시동생이 준 금덩이가 말썽을 빚어 간첩누명으로 2년간 옥살이를 했다. 이것으로 할머니의 불행은 끝나지 않았다. 6.25사변이 끝난 후 강원도 강릉으로 내려가 조용히 여생을 보내다 신세타령한 것이 화근, 반공법 위반혐의로 10년을 선고 받고 전주서 다시 옥살이를 해야 했다.

이 할머니는 수감생활을 하면서 신앙을 접하게 됐다. 먼저는 캐나다 선교사에 의해 개신교를 알게됐다. 그 후 68년경 당시 전주 성심여중 교사로 근무하던 김 세노비아 수녀(인보 성체 수녀회)가 교도소를 방문, 재소자들을 위로하던 중 귀티가 나던 이 할머니를 발견하고 계속해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 할머니가 예순이 넘어 처음으로 천주교와 접하게 된 첫 계기.

할머니는 70년 출감 후 캐나다 선교사의 도움으로 이리에서 잠시 살다 자신의 신분이「황녀」로 노출됨에 따라 72년 전주시의 도움으로 경기전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이때부터 김수녀는 할머니의 외로운 처지를 동정, 매주 토요일 학교 근무가 끝나는대로 할머니를 방문하고 말벗이 돼주는가 하면 용돈을 아꼈다가 맛있는 음식도 사드리는 등 친어머니처럼 모셔왔다.

김 수녀가 할머니에게 틈틈이 천주교 신앙을 얘기해오던 중 할머니는 마침내 78년 5월 22일 당시 전주 전동본당 주임신부로 있던 김환철 신부(현 전주교구 총대리)에 의해 마리아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김환철 신부는 마리아 할머니가 세례받을 당시, 자신의 조부 대원군이 무죄한 천주교 신자들을 무참히 죽였기 때문에 속죄하는 마음으로 천주교에 귀의, 남은 여생을 보내겠다고 말한 것으로 전했다.

이제 마지막으로 비운의 황녀 이 마리아 할머니는 천주교회의 품안에서 조용히 세상을 하직했다.

김기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