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대째 내려오는 구교우 집안 출신
서상범 주교는 1961년 2월 6일 서울시 강북구 미아동에서 부친 서성용(안드레아)옹과 모친 봉병옥(아녜스) 여사의 2남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3대째 내려오는 구교우 집안의 가풍은 소년 서상범을 자연스레 주님이 마련하신 길로 이끌었다. 어린 시절 미사를 드리기 위해 성당을 찾아가던 산길은 소년 상범에게는 겁나는 길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미사를 빠진다는 것은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 본당 사목회장인 아버지와 성가단장으로 본당 일이라면 누구보다 앞장섰던 어머니는 자상했지만 자녀들의 신앙생활만큼은 엄격함을 넘어 무서울 정도였기 때문이다. 은행원이었던 서 주교의 아버지는 은퇴 후에도 자신의 재능을 교회를 위해 내놓아 가톨릭대학교에서 10년 넘게 봉사할 정도로 신심이 깊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본당에서 복사를 서야 했던 소년 서상범은 주일이면 4대의 미사를 혼자 서야 할 때도 있었지만 군소리 하나 없이 그 시절(?)을 견뎌 내 어른들의 칭찬이 잇따를 정도로 될성부른 나무로 자랐다.
열심한 복사생활과 신앙심 깊었던 부모님의 영향으로 그의 미래는 자연스레 사제의 길로 이어졌다. 서 주교는 복사 시절부터 소신학교 시절을 거쳐 대신학교로까지 이어지는 여정을 거쳐 지난 1988년에 사제로 서품된 이른바 ‘88 올림픽 사제’다.
형과 함께 형제 사제로 잘 알려진 서 주교는 “지나고 보면 모든 게 감사할 뿐입니다. 제가 한 몫보다 더 큰 결실을 거둘 수 있었던 건 오로지 그분으로 인한 것”이라고 말한다.
부족하기 짝이 없는 자신 같은 사람을 사제로 불러 주셨다는 사실이 정말 ‘신비’였기에 그저 감사드릴 수밖에 없다는 그는 자신의 길에 많은 이들을 초대하고 있다.
■ 군종신부 시절 새롭게 만난 하느님
서상범 주교에게 군영은 하느님을 새롭게 만난 광야였다. 군대는 그가 지닌 가장 큰 무기인 감사하는 마음을 펼치기에 더없이 좋은 장이었다.
군종사관후보생 49기로 지난 1991년 7월 임관한 서 주교는 첫 부임지인 육군 6사단 청성본당을 시작으로 군에서만 14곳의 임지에서 다양한 사목활동을 펼쳤다. 사단급 부대를 비롯해 교육부대, 파병, 군사령부, 국방부 등 각급 부대를 골고루 경험했다.
1999년은 서 주교가 하느님의 부르심에 따라 새롭게 변모한 해라고 할 수 있다. 베트남전 파병 이후 34년 만에 처음으로 유엔 평화유지군 자격으로 동티모르에 파견돼 400여 명 특전용사와 지원대대 병력을 대상으로 현지에서 군사목을 펼쳤던 경험은 지금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든 처참한 동티모르의 상황 속에서도 주님을 향해 차오르는 감사하는 마음은 잠시도 그를 편안한 자리에 머물러 있지 못하게 만들었다. 기초적인 생필품마저 없어 사람다운 생활이라곤 기대조차 할 수 없는 현지민들에게 이발은 사치였을지도 모른다. 그런 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는 생각에 손수 가위를 든 그였다. 그렇게 동티모르에 머물던 6개월 남짓한 기간 동안 머리를 깎아 준 이들만 300여 명. 얼마나 현지인들을 만나고 다녔던지 원주민과 분간이 안 될 정도로 까만 피부로 돌아온 서 주교를 기억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서 주교는 당시 한국교회와 국민의 95%가 신자인 동티모르교회 간 가교 역할을 훌륭하게 해 내 이후 파견되는 군종신부들이 사목 활동을 펼치는 데 기틀을 만들었다. 그의 성공적인 활동이 바탕이 돼 이어진 한국군의 활동은 현지 주민으로부터 ‘말라이 무띤’, 다국적군의 왕이라고 불릴 만큼 동티모르의 평화와 안정에 크게 기여했다. 그 결과 1977년 인도네시아령으로 강제 편입돼 굴곡의 역사를 겪었던 동티모르는 2002년 독립해 21세기 첫 독립국이 되기에 이른다.
서 주교의 탈렌트는 군사목 현장 곳곳에서 발휘됐다. 그는 육·해·공군 등 군 내 종교 업무를 총괄하는 군종병과의 최고 책임자인 국방부 군종과장(당시 육군 대령)으로 물러나기까지 21년6개월간의 군사목 기간 동안 종교 간 화합에도 남다른 재능을 발휘했다. 군문(軍門)에서 그를 만났던 이들이라면 누구 하나 그의 친화력을 꼽지 않는 이가 없을 정도다. 육군이 지난 2003년 천주교·불교·개신교 등 각 종단 군종장교와 함께 군대 부적응자를 위한 비전캠프를 개설할 수 있었던 것도 서 주교 제안 덕분이었다. 개신교 지휘관이나 불교 법당에서도 화합의 자리를 마련할 때면 빠지지 않는 존재가 그였다. 늘 웃음을 불러오는, 평화를 이루는 사제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