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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의 시간을 걷다] (3) 김대건 유학하다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21-02-02 수정일 2021-02-02 발행일 2021-02-07 제 3231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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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제생처럼 평가됐지만 피나는 노력으로 위기 극복
동기 중 가장 늦게 선발돼
라틴어와 기본 소양 저평가
복통·두통 등 건강 문제 겪어
힘든 상황에도 실력 갈고 닦아
라틴어·프랑스어·중국어 구사
지적됐던 성격도 용기로 승화
지리학, 항해술 조예 깊어져

중국 마카오의 카모에스 공원에 설치된 성 김대건 신부 동상. 김대건 신부가 유학하던 시절에도 이곳은 공원으로 조성돼 있었다. 유학 당시 공원 인근에는 김 신부가 지냈던 파리외방전교회 동양대표부가 자리하고 있었다.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신학생으로 발탁된 최방제(프란치스코), 김대건(안드레아), 최양업(토마스). 오늘날 우리는 이 세 사람을 최초로 서양의 근대식 교육을 받은 유학생으로 기억한다. 역사 안에서 참으로 빛나는 이력이지만, 이들의 유학생활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김대건·최양업은 어떻게 유학생활을 했을까. 이번 편에서는 두 신부가 유학시절을 보낸 시간을 들여다본다.

■ 낙제생 김대건

낯선 환경에서 낯선 언어와 문화, 낯선 사람들 속에서 걷는 외로운 배움의 길. 일반적으로는 그 정도가 유학생활의 어려움이다. 그러나 김대건에게 유학생활은 더 혹독한 환경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마카오의 신학교를 비롯해 필리핀 마닐라와 롤롬보이, 소팔가자·훈춘 등 만주지역과 프랑스 함선 등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장소를 전전하며 공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대건의 유학생활은 더 큰 어려움이 따랐다.

“불쌍한 안드레아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1839년 8월 11일 김대건과 최양업의 교육을 담당하던 리브와 신부는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김대건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김대건이 사제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한 회의가 들었기 때문이다. 리브와 신부는 김대건이 “늘 복통과 두통, 요통을 앓고 있다”며 건강상의 이유로 머리털이며 낯빛이 엉망임을 전했다.

조선인 신학생의 교육을 담당했던 사제들 서한을 살피면 김대건은 1836년 유학길에 올랐을 당시부터 거의 8년에 달하는 시간 동안 늘 복통과 두통에 시달렸던 것으로 나타난다. 당시 김대건을 만난 선교사 중에는 칼르리 신부나 트와네트 신부 등 의사이기도 한 사제들도 있어 약을 처방했지만, 김대건의 증상은 도무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마카오에서는 신학생들이 파리외방전교회 동양대표부에 머물면서 여러 잡일도 맡아 했는데, 칠면조 집의 대들보를 들어 올리다 요통마저 생겼다. 리브와 신부는 다행히 식사나 수면에는 큰 지장이 없어 위험한 병은 아닌 것으로 짐작했다. 그러나 건강한 몸으로도 수행하기 힘든, 박해를 겪고 있는 조선의 방인사제라는 막중한 임무를 김대건이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리브와 신부가 김대건이 사제가 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한 이유는 비단 김대건의 건강에만 있지 않았다. 매스트르 신부는 김대건에 대해 “문체가 어떤 때는 상당히 잘 쓰고 또 어떤 때는 상당히 잘 쓰지 못한다”고 평가하고, 또 성격 면에서도 “자주적이고 경솔하며 행동이 주의 깊지 못하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세 명의 신학생 중 가장 신심이 깊고 라틴어 실력도 우수해 스승 신부들이 큰 기대를 걸던 최방제와 건강하고 판단력이 우수하다는 평을 듣던 최양업과는 대조되는 평가였다.

실제로 김대건은 신학생 중에서도 가장 늦게 선발돼 학업에 불리한 측면이 있었다. 최양업과 최방제는 이미 4~5개월가량 모방 신부에게 라틴어와 기본적인 소양을 배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방 신부는 처음엔 최양업과 최방제만 유학을 시키고 김대건을 후에 보내려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박해가 지속되고 있는 만큼, 앞으로 마카오로 보낼 수 있는 기회가 없을 수도 있겠다 여겨 함께 보냈던 것이다.

리브와 신부는 편지를 통해 김대건이 “판단이 늘 좋은 것이 아니”라며 “안드레아(김대건)와 토마스(최양업) 사이에 균형이 도무지 없어” 데플레슈 신부 등 김대건·최양업의 스승들이 난처해하고 있음을 기록하기도 했다. 1837년 위열병으로 최방제가 사망한 이후, 김대건과 최양업의 스승들이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두 신학생이 비교될 수밖에 없었을 것은 짐작하고도 남을 정도다. 김대건은 비록 낙제했다는 기록은 없지만, 낙제생이나 다름없는 상황 속에서 유학생활 대부분을 보냈다.

■ 포기를 모르는 용기와 끈기

남들보다 뒤처진 출발점에 악화된 건강, 성격적인 단점, 거기에 우수한 평가를 받는 비교 대상이 늘 함께 있는 상황. 좌절한다 해도 고개가 끄덕여질 법한 역경이었지만, 김대건은 올곧게 자신의 길을 나아갔다. 김대건이 얼마나 피나는 노력으로 공부하고 자신을 갈고 닦았는지는 훗날 김대건의 활동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김대건은 초기에는 신학공부에 가장 기본이 되는 라틴어 실력이 다른 신학생들에 비해 뒤쳐졌지만, 후에는 라틴어뿐 아니라 프랑스어와 중국어까지 구사할 수 있을 정도로 언어실력을 키웠다. 그러나 파리외방전교회는 조선인 신학생들이 신학공부에 열중하도록 라틴어 외의 언어공부를 금지했다. 김대건은 1842년 12월 르그레주아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프랑스어 독서는 무익하다고 여겨지지 않는다”면서 “만일 불라사전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지금쯤은 프랑스어 책들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더 공부하지 못한 아쉬움을 전하기도 했다.

특히 이런 언어공부는 결국 김대건에게 큰 기회를 선사하기도 했다. 바로 1842년 프랑스함대 에리곤호에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통역관 자격으로 승선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에리곤호 의사의 처방으로 김대건의 체질이 건강하게 바뀔 수 있었다. 비록 조선 입국이라는 본래 승선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김대건은 영국과 청나라가 남경조약을 맺는 시기에 통역관으로 동석하고, 에리곤호가 탐험하는 지역들을 함께 다니면서 여러 나라 문화를 접하고 국제정세를 파악하는 등 에리곤호 승선 기회를 통해 견문을 넓히고 가능한 한 많은 것들을 익혔다.

전주대 서종태(스테파노) 교수는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에 대한 연구」에서 “이러한 경험은 김대건이 훗날 선교사들의 입국로를 개척하고 페레올 주교 등을 영입하는 데 큰 힘이 됐다”며 “김대건은 끝내 여러 불리한 조건들을 모두 극복하고 장차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사제품을 받기에 이르게 된다”고 말했다.

김대건은 “자주적이고 경솔”하다고 지적받던 자신의 성격을 비관하지 않고 용기로 승화시켰다. 브뤼니에르 신부가 1842년 12월 작성한 서한에 따르면 브뤼니에르 신부와 매스트르 신부, 김대건·최양업 일행이 배를 타고 요동에 도착했을 당시 세관과 관리들에게 큰 위협을 당했는데, 이때 김대건이 특유의 재치와 용기를 발휘해 큰 소리로 일장 연설을 하면서 군중을 설득해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신학과 철학, 언어능력뿐 아니라 지리학, 항해술 등에도 조예가 깊었던 김대건은 조선의 고관대작들에게 대단한 학자로 여겨졌다. 김대건은 1846년 8월 26일 감옥에서 쓴 편지에서 자신이 옥중에서 대신들의 지시로 세계지도 번역과 지리개설서 편찬 작업을 하고 있음을 알리면서 “그들은 저를 큰 학자로 여기고 있다”며 “참으로 딱한 사람들”이라고 전하기도 했다.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조한건 신부는 “김대건·최양업의 교육환경은 결코 좋지 못했지만, 그들은 적응하기 어려운 유학 환경에서도 과정을 잘 마치고, 사제품을 받고 돌아왔다”며 “그들의 열정이 두려움을 몰랐고, 그들의 노력이 지칠 줄 몰랐다”고 평가했다.

■ 김대건의 시간을 함께 걸을 수 있는 곳 – 마카오 카모에스 공원

마카오 카모에스 공원은 김대건 신부가 유학하던 시절에도 공원으로 조성돼 있던 곳으로, 인근에 김대건 신부가 생활했던 파리외방전교회 동양대표부가 자리하고 있었다. 현재 대표부는 남아 있지 않지만, 카모에스 공원에 김대건 신부 동상이 세워져 있어 김대건의 유학시절을 묵상할 수 있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