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이는 주님 앞에 평등’ 조선 민중 일깨우다 세상과 인간, 거룩함의 근원이 하느님께 있음을 깨우치도록 알기 쉬운 비유로 교리 설명 상대방의 입장 고려한 가르침 모든 신자들을 벗으로 부르며 보편적 가치인 평등 사상 전파
사제의 중요한 직무 중 하나는 ‘가르치는 직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사제의 생활과 교역에 관한 교령」에서 “사제들은 신앙의 교육자로서 스스로 또는 다른 이들을 통해, 모든 신자가 각기 성령 안에서 복음에 따라 자기 소명을 계발하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실 그 자유와 실천하는 진실한 사랑에 이르도록 보살펴줘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는 신자들을 어떻게 가르쳤을까.
■ 기쁨과 열성으로 “그는 교리를 설명하고 교우들을 가르치는 데 기쁨과 열성을 다했고, 또한 큰 열성으로 성사를 집전했다.” 김대건의 시복재판 중 이 베드로는 김대건이 신자들을 가르치는데 얼마나 기쁘게, 그리고 열성을 다했는지를 증언했다. 그리고 그런 김대건의 가르침은 신자들의 마음도 감화시켰다. 마찬가지로 김대건의 시복재판을 위해 증인으로 나선 김 프란치스코는 “모든 교우들이 이 신부를 많이 사랑했으며, 그들은 오로지 신부를 칭찬할 뿐이었다”며 김대건의 가르침에 담긴 기쁨과 열성에 신자들이 얼마나 기뻐했는지를 보여줬다. 그렇다면 김대건의 ‘기쁨과 열성’이 담긴 가르침은 어떤 것이었을까. 아쉽게도 김대건이 가르치던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자료는 그리 많지 않다. 다만 김대건이 신자들에게 남긴 편지를 통해 김대건이 어떤 방식으로 신자들을 가르쳤는지 엿볼 수 있다. “교우들 보아라, 우리 벗아 생각하고 생각할지어다. 천주 무시지시로부터 천지 만물을 배설하시고, 그중에 우리 사람을 당신 모상과 같이 내어 세상에 두신 위자와 그 뜻을 생각할지어다.” 김대건은 1846년 8월 옥중에서 작성한 마지막 편지에서 신자들에게 마지막 가르침을 전한다.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신자들에게 전하는 말, 김대건은 “할 말이 무궁한들 어찌 지필로 다하리”라며 안타까움을 표현하면서 자신이 전하고 싶은 가장 중요한 가르침을 함축적으로 편지에 담았다. 김대건은 한처음에 세상을 창조하시고, 하느님의 모상으로 인간을 창조한 뜻을 생각하길 권하면서 하느님의 창조와 인간의 도리를 밝히고 있다. 조선교회는 선교사들이 오기 전 이미 신자들이 스스로 신앙을 받아들인 교회다. 초기교회 신자들은 중국에서 들여온 한문서학서를 통해 교리와 성경을 상당한 수준으로 이해하고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한글교리서를 편찬해 보급하기도 했다. 이후 선교사들이 찾아와 가르치기는 했지만, 조선 민중들의 전통적 이해를 바탕으로 신학적으로 정리된 교리를 가르친 것은 김대건이 최초였다. 특히 김대건은 민중들이 지닌 세상과 인간에 대한 전통적 이해를 바탕으로 그 근원이 바로 하느님으로 향한다는 것을 스스로 깨우칠 수 있도록 교리를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김대건은 편지 초입에서 신자들에게 “생각하길” 여러 차례에 걸쳐 당부하고 있다. 또한 하느님의 구속사업을 농사에 빗대 사람을 벼로 은총을 거름으로 비유하며 농경사회를 살아가는 신자들이 하느님과 세상, 인간, 심판 날 등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접근했다. 「성 김대건 바로알기」를 저술한 김정수 신부(부산교구 원로사목)는 “(김대건 신부는) 조선 사회에 하느님을 어떻게 많이 알리고 전할 것인가를 고민했다”며 “신부는 조선의 민중에게 전통적으로 전해 내려온 인간과 세상에 관한 거룩함의 근원이 바로 하느님께 있음을 알렸으며, 이는 그 자체로도 조선의 민중에게 엄청난 깨우침이었다”고 전했다. ■ ‘벗’들을 일깨우다 김대건이 신자들을 가르치는 모습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가르치는 태도와 거리가 있다. 이미 정해진 교리를 가르치는 만큼 일방적인 교육이 될 수 있었지만, 스스로 생각해 깨달을 수 있도록 했다. 또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해 그 눈높이에 맞춰 설명하려 했다. 김대건의 가르침을 받는 신자들을 자신과 동등한 높이에 둔 것이다. 그래서 김대건은 신자들을 향한 편지에서 신자들을 ‘벗’이라고 불렀다. 사제와 신자들의 관계가 선생과 제자, 혹은 가르침을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상하 관계가 아닌, 위아래가 없이 평등한 친구이길 바랐던 것이다. 김대건의 이런 태도는 예수님이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주었기 때문이다”(요한 15,15)라고 한 말과 같은 맥락에서도 이해할 수 있다. 김대건은 박해자들에게 붙잡힌 상태에서도 하느님을 가르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이렇듯 김대건이 신자와 비신자, 심지어 자신을 반대하는 박해자들에게까지도 열과 성을 다해 가르친 것은 신자들을 ‘벗’이라 부른 김대건의 마음과 연결된 것으로 보인다. 김대건에게는 그들 역시 하느님의 자녀고, ‘벗’이 될 이들이었다. ‘벗’이 되길 바라며 다가가는 김대건의 가르침은 신자만이 아니라 비신자, 심지어 박해자까지도 납득시킬 정도로 설득력이 있었다. 김대건은 관아에 잡혀 결박당한 상태에서도 구경꾼들에게 밤이 되도록 교리를 가르쳤는데, 구경꾼들은 김대건의 가르침을 듣고 “임금님이 금하지만 않으면 자신도 믿겠다”고 말했다. 황해도 해주 감영으로 이송돼서는 자신을 조사하는 감사에게 영혼의 불사불멸, 천당과 지옥, 하느님의 존재, 죽은 후의 행복을 위한 하느님 공경의 필요성 등을 설명했다. 김대건의 설명을 들은 감사와 그 부하들은 “당신이 한 말이 다 좋고 이치에 맞는 말”이라면서도 “그래도 임금님이 금하지 않느냐”고 답했다. 한양 포도청에 가서도 재판관에게 교리를 상세히 설명하자 재판관은 “당신의 종교도 좋소”라고 인정하기도 했다. 모든 이를 ‘벗’으로 여기며 평등하게 바라보는 김대건의 가르침은 시대를 뛰어넘어 여전히 전해지고 있다. 유네스코가 김대건을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정한 데 이어, 올해를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 유네스코 세계 기념해’로 지정한 것도 이런 까닭이다. 유네스코 한국위원회는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을 유네스코 세계 기념해로 지정한 이유로 “조선이라는 계급 사회 안에서 기득권적 삶을 포기하고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평등사상과 인간의 존엄, 생명, 진리, 정의 등 보편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김대건 신부의 생애가 전 세계의 공감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김대건이 신자들은 직접 가르친 기간은 1년도 채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삶의 여정은 태어난 지 2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의 모든 이들에게 ‘평등’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가르쳐주고 있다.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