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나 갈릴레오가 우르바노 8세 교황과의 친분 관계를 오판했던 것은, 성경을 해석하는 일에서 자신의 권한을 넘어선 것 못지않게 그의 몰락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1633년 검사성성의 결정은 「두 우주 체계에 관한 대화」의 출판 이후 사실상 그에게 크게 화가 난 교황의 의중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었기 때문이죠.
이러한 교회 교도권의 권위 문제에 대해서 교회를 비판하는 입장에서 보기에는, 갈릴레오 사건이 ‘본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성경 해석 및 세속적 결정권에서의 교회 권위를 훼손한 것으로 오해받은 한 명의 힘없는 과학자에 대해 교회가 과도하게 반응하며 권력을 행사한 사건’으로서 여겨지기 쉽습니다. 갈릴레오 사건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이 사건 이후 오랜 기간 동안 유럽의 지성인들, 특히 무신론적 계몽주의자들의 교회 비판을 통해 대중적으로도 널리 알려져 왔으며, 갈릴레오가 ‘교회로부터 박해를 받은 무고한 순교자’로 묘사되는 데에 큰 영향을 끼쳤고 현재에도 대중적으로 여전히 영향을 끼치는 중입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갈릴레오 사건에 대한 전통적인 역사적 해석은 ‘한 명의 과학자에 대한 교회의 몰이해로 인한 과도한 권력 행사’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었습니다. 하지만 20세기에 들어와서 “과학이란 무엇인가?”를 철학적으로 묻고 탐구하는 새로운 철학 분과인 과학철학이 발전해 가면서 갈릴레오 사건에 대한 해석이 이전과는 사뭇 다른 양상으로 흘러가게 되었습니다. 갈릴레오 사건은 20세기 중반 이후 오늘날에 와서는 과학철학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질문인 소위 ‘실재론 문제’를 보여주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예로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음 편부터는 갈릴레오 사건을 현대 과학철학자들이 제시한 새로운 관점으로 들여다보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