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으로 가톨릭 교회는 신자들에게 신앙을 심어주기 위해 주로 ‘보이는 것’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지금도 수많은 종교예술 작품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작품들은 신자들이 교리의 내용을 이해하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실제로 많은 신자들이 성당에서 십자고상, 성화, 조각, 제대와 제구를 보고, 경건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고 이야기 합니다.
반면, 개신교들에서는 대체로 보다 대중적인 음악과 문학이 수용되고 발전해 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상 안에서 발견하고 느끼는 아름다움, 즐거움, 슬픔, 설렘, 위로 등을 하느님의 은총으로 발견하고 또 그것에 대한 감사를 표현할 수 있도록 여러 도구를 수용한 것이지요. 실제로 개신교 신도들은 대부분 교회의 경건한 이미지보다 신앙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느끼고 또 표현하고 싶어 하는 경향이 강한 것 같습니다.
인간의 오감을 통해 경험하는 모든 것들이 하느님과 관련된 것은 분명하지만, ‘하느님은 인간의 오감으로 체험되는가?’라는 질문은 다릅니다. 예수님을 직접 만나고 그분과 대화를 나누었던 제자들과 달리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각자 다양한 신앙적 체험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읽는 것도 듣는 것도 다 인간의 오감과 관련 있는 것이지만, 저는 인간에게는 영혼 안에 신앙을 위한 또 하나의 감각이 있기에 일반적인 감각으로 받아들인 사건들이 하느님 체험으로 연결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보이는 것에서, 듣고, 말하고, 표현하는 것에서 찾는 감흥들도 결국 이 영혼의 감각을 깨우지 못한다면 소용이 없습니다.
인간보다 많은 감각을 가지고 있고 지능이 높다고 알려진 동물들이 많지만, 어떤 동물들에게도 신앙을 교육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 기도하는 모습은 오로지 인간만 보이는 모습입니다. 영혼이 지닌 이런 신앙적 감각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 관계의 끈입니다. 그래서 저는 인간이라면 모두가 가지고 있는 이 감각을 통해 하느님을 ‘체험’한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의 감각은 우리의 감각으로 당연하고 익숙하게 느끼는 것에서도 의문을 가지고 늘 답을 찾으려고 고민하고 그 답을 하느님과의 대화 곧 기도 안에서 찾는 과정의 반복 안에서 발달합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말씀처럼, 내가 이미 보고 들은 것으로 형성되는 신앙이 아니어도,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내 영혼이 느끼는 것들을 희망과 사명으로 받아들이는 신앙이 가능합니다. 우리는 영혼의 감각으로 하느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대화를 통해서 신앙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 대화는 내적인 대화이며 그 누구도 나를 대신해서 그분과 나눌 수 없는 대화입니다.
그러나 신앙을 위해 교회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교회는 영혼의 감각으로 우리가 체험하는 것들을 영적으로 식별하고 올바른 신앙 안에서 굳건하게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해 주는 은총의 표지 ‘성사’이기 때문입니다.
글 _ 이상협 그레고리오 신부(수원교구 이주사목위원회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