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사무실에 출근을 하면 커피를 내리기 전에 음악을 선곡한다. 사실 음악을 듣는 취미는 없었다. 운동삼아 혼자 걸을 때나, 가끔 운전할 때 외에는 노래를 듣지 않았다. 그런데 매일 사무실에 앉아 있자니 좀이 쑤셔서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이거라도 해야 살 것 같았다. 사무실 일을 해본 적 없는 나에게 사무실 책상은 정말 친해지기 어려운 자리 같다.
아무튼 그날 아침에 날씨와 기분, 또는 상황에 맞는 노래를 선곡하고 커피를 한잔 마신다. 방금 출근했지만 ‘퇴근하면서 듣는 노래’를 듣기도 하고, 날이 좋은데 사무실에 있을 때면 ‘이별을 주제로 하는 노래’, 사무실이 답답할 때면 ‘훌쩍 떠나고 싶을 때 듣는 노래’, 이런 플레이 리스트를 찾아 듣는다. 노래를 듣는다고 크게 달라지지도 않고, 내 귀에 그 노래들이 다 들어오는 것도 아니지만 일단 틀어둔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며 노래를 틀어 놓은 것도 잊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게 된다. 스피커에서 노래가 나오고 있지만 자각하지 못하고 몇 시간을 보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시계를 보면 어느덧 점심시간이 오고, 퇴근 시간이 온다. 참 신기한 일이다. 이래서 노래를 듣고 사는 건가 싶다. 어느 코미디 프로에서 “이걸 꽂고 있어야 업무 능률이 올라갑니다”라며 눈을 똥그랗게 뜨고 있는 장면도 생각난다.
음악이 그렇게 하루일과에 스며들고, 마음에 스며드는 힘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는 것 같다.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지만 이미 음악은 나를 편하게 만들고, 타임슬립마냥 한참 뒤의 시간으로 나를 옮겨두니 말이다.
그러면서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해본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지만 들리는 듯 안 들리는 듯 스며들어 기쁨과 위안을 주는 음악 같은 사람 말이다. 잔소리나 길거리에서 들리는 듣기 싫은 광고음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삶을 노래하는 그런 사람 말이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걸으면서 그분이 성경을 풀이해 주시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이 자신들이 사랑했던 주님임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들은 예수님을 저녁식사에 초대했고, 예수님께서 빵을 쪼개어 나눠 주실 때, 마침내 그들은 그분이 주님이심을 알아보았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는 빵 나눔, 곧 성찬례 안에서 당신을 온전히 담아내셨고, 이 성사를 통해 우리에게 분명히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이야말로 내가 생각하는 음악 같은 사람이 아닐 수 없다.
한 주를 보내면서 음악 같은 주님의 말씀에 젖어, 그렇게 우리도 다른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멜로디를 전할 수 있으면 좋겠다.
글 _ 문석훈 베드로 신부(교구 비서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