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11월이다. 하느님께 받은 숨을 돌려드린 분들을 각별히 기억하는 위령 성월을 지내고 있는데, 죽음이 무엇인가?
1897년 4월 말경 스물넷 젊은 리지외의 데레사는 아침마다 각혈을 했다. 결핵 말기에 이른 그는 밤이 되면 특히 기침이 심해져서 고통을 겪었다. 그는 1897년 9월 30일에 하느님께 받은 숨을 돌려드리는데, 그는 곧 죽음을 맞을 것을 인식하면서 말한다. “나를 찾아오게 될 것은 죽음이 아니라 하느님이에요.”
데레사에게 죽음은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 죽음은 하느님이 자기를 데리러 오시는 것이다. 이런 죽음 의식을 갖고 있던 그는, 언니 수녀들이 그가 죽어서 자신들 곁을 떠나는 것으로 여기며 아파할 때, 자기가 죽음을 맞으면 살아 있을 때보다 더 실제적으로 언니들 곁에서 그들과 함께 살 것이라고 말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들을 위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깨워 준다.
데레사가 죽음을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것으로 이해하고 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느님을 깊게 신뢰했기 때문이다. 그는 결핵으로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동안에도 하느님에 대한 신뢰 속에서 살았다. 그는 죽음 준비를 위해 ‘성사를 받는 것’도 하느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시는 것’도 다 “좋다”고 했다. 그 ‘모두가 은총’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자서전에서 은총의 바다, ‘은해’(恩海)에서 살고 있다고 말했는데, 그는 자기가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모두 하느님 은총의 작용으로 알고 살았던 것이다. 그의 이같은 하느님 신뢰는 고통을 많이 받는 것도 적게 받는 것도 관심이 되게 하지 않는다. 그가 관심을 갖는 유일한 것은 이런 신뢰 속에서 하느님이 바라시는 일을 하는 것이다.
큰 언니 성심의 마리 수녀는 데레사가 겪는 고통을 안타까워하며 말한 적이 있었다. “당신이 많이 고통받지 않도록 기도했는데, 당신은 이토록 고통받고 있어요!” 이때도 데레사는 단순하게 답했다. “나는 하느님께, 나에 대한 그분의 계획을 이루시는 데 장애가 되는 기도는 듣지 마시라고 청했어요. 그리고 그것에 어긋나는 모든 어려움을 거두시라고 했어요.” 이것은 하느님에 대한 그의 신뢰가 얼마나 깊은지를 증거하는데, 이 하느님 신뢰가 ‘어린이의 길’이라고 알려진 그의 ‘작은 길’의 핵심이었다.
데레사는 어느 날 말했다. “이처럼 고통받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어요. 나는 어린아이처럼 고통받고 있어요.” 그러면서 그는 말한다. “나는 더 큰 고통을 청하고 싶지 않아요. 그분이 고통을 늘리신다면, 그것이 그분으로부터 오는 것이니, 나는 기쁘고 즐겁게 고통을 참아 받을 거예요. 그러나 내 스스로 힘을 가지기에는 내가 너무도 작아요. 내가 고통을 청한다면 그건 나의 고통이 될 것이고, 나는 그것들을 혼자 참아야 할 거예요.”
자기가 겪는 고통은 그분께서 주시는 고통이기 때문에, 그분이 이 고통을 겪을 수 있는 힘도 자기에게 주시리라는 신뢰 속에서 그는 말한다. “나는 절대로 아무것도 혼자서 할 수 있었던 적이 없답니다.”
하느님에 대한 데레사의 이 깊은 신뢰가 고통을 그렇게 기쁘게 받아들이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죽음을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자기를 데리러 오시는 것으로,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것으로 알고 살게 한다. 그의 이런 죽음 이해가 그토록 기쁘게 하느님 안에서 하루하루를 사랑하며 살 수 있게 한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는 추상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충실하게 살고 기쁘게 죽음을 맞을 수 있게 하는 원천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작은 데레사의 이같은 삶과 죽음 이해가 오늘 우리 모두에게 희망과 위로의 메시지가 될 수 있기를 기원한다.
글 _ 황종열 레오(가톨릭꽃동네대학교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