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주말 편지] 이틀 동안 누린 기쁨 / 안영

안영(실비아) 소설가
입력일 2018-03-27 19:01:38 수정일 2018-03-27 19:01:38 발행일 2018-04-01 제 3088호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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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3월 23일 금요일, 남쪽 대구에서 편지를 씁니다.

근래에 초등학생 ‘손자 돌봄이’ 노릇을 하느라 대구 나들이가 잦아졌습니다. 요즈음 같이 아이들이 귀한 시대에 봉사 중 가장 보배로운 봉사는 손자 돌보기가 아닐까요? 퇴직 후 이런저런 봉사를 해 오던 저는 몇 년 전부터는 모두 접고 오직 제 본당인 수원교구 분당성요한본당 어르신대학인 ‘요한대학’에서 목요일마다 말씀봉사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따금 아들 며느리가 다급하게 불러댑니다. 제발 그날이 목요일이 아니기를 바라지만 이번에는 겹쳐버렸습니다. 할 수 없이 학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대구로 달려왔지요.

돌봄이 노릇은 힘도 들지만 보람도 많습니다. 우선 인성 교육의 기초인 신앙교육을 시킬 수 있음이 참 좋아요. 첫영성체를 마친 뒤부터는 대화가 통하니까 잠자리에 들면 성경 속 인물 이야기로 재미와 교훈을 주고, 마지막엔 주모경을 바치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시킵니다.

아이를 등교시키고 나면 성당으로 가서 아침미사를 드립니다. 아들네 집 인근에는 월배성당이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수도원이 함께 있는 유서 깊은 성당이랍니다. 그래서 이름도 다정한 ‘프란치스코 관’, ‘클라라 관’ 등 건물이 있고, 드넓은 마당에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열 그루도 넘게 서 있어 작년 가을엔 환상적인 단풍 구경도 했지요.

그런데 목요일인 어제는 재미난 일이 있었어요. 요한대학생들로부터 어디가 아파서 결강한 거냐는 전화를 받느라고 미사 시간을 놓쳤어요. 하지만 늦게라도 성당엘 갔지요. 아들네 세 식구를 생각하며 성모님 앞에 촛불 세 자루를 켜고 기도하고 일어서는데, 한 자매님이 저를 마구 부르시는 거예요. “이리 와요. 밥 먹고 가요. 얼른 와요.” 저는 당황해서 “저 이 성당 신자 아닌데요.” 했더니 “그게 무슨 소리, 다 같은 형제자맨데. 어서 와서 밥 먹고 가!” 하며 그곳 ‘클라라 관’으로 저를 끄는 것이었어요.

아하, 이곳에서도 목요일에 노인대학이 열린다는군요. 지금 성경공부 마치고 점심 먹는 시간이라고요. 남녀 학생들이 한 오십여 명 앉아서 즐겁게 식사를 하고 계셨어요. 저도 그분들 곁에 앉았지요. 그러자 한 분이 갑자기 제게 말을 거십니다. “안 보던 자매님이네. 새로 들어왔어요? 우리 노인들 이렇게 좋은 곳 없어요. 성경 말씀 듣고 밥 같이 먹고, 얼마나 재미있는데, 목요일마다 꼭 와요.” 저는 주위 분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며 네, 네, 소리만 연발했지요. 꼭 성모님께서 차려주신 밥상만 같았어요. 제 쓸쓸한 ‘혼밥’을 미리 걱정하시고 교우들 서리에 앉혀주신 그 사랑!

그리고 오늘, 그곳에선 처음으로 새벽미사에 갔어요. 본당 건물에 불이 없어 이상히 여겼더니 새벽에는 수도원 성당에서 드린다는군요. 사람들 따라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2층으로 오르니 아주 아담한 성당이 있었어요. 대여섯 분의 신부님, 예닐곱 분의 수녀님, 그리고 한 삼십여 명의 평신도들과 함께 미사를 드렸어요. 미사 후에는 성무일도도 바치더군요. 어쨌건 어찌나 아늑하고 좋던지, 사순 시기에 이렇듯 경건한 미사에 참석할 수 있어 기뻤지요.

밖으로 나오니 그새 날이 밝아 있었어요. 계단을 내려서는데, 어머나! 바로 그 눈높이에 하얀 목련꽃 여남은 송이가 활짝 피어 저를 반겨주는 것이었어요. 놀라 살펴보니 아주 큰 나무였고, 가지마다 봉우리들이 잔뜩 매달려 뾰촘뾰촘 벙글고 있었어요. 아, 부활의 신비여!

이 글이 도착할 때쯤은 주님 부활 대축일이겠지요? 축하합니다. 알렐루야!

■ 외부 필진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안영(실비아) 소설가